“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역력히 비쳐 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김일성장군…”
지금도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애국가만큼이나 잘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60년대말 김신조사건 이후 대북 보복 침투를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진, 이른바 실미도부대 사람들. 71년 8월 부대가 위치한 서해상의 실미도를 탈출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 한복판까지 진입했던 이들 특수요원은 대북 침투를 위해 조직된 만큼 말투도 옷차림도, 오로지 북한식으로만 훈련됐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훈련과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반란사건을 일으켰다가 서울 노량진에서 자폭하거나 군사재판에서 전원 사형당했다.
김신조사건 이후 대북보복 위해 조직
그런데 최근 당시 훈련병들 중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증언이 나와 군 관계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실미도 사건을 묘사한 소설 ‘실미도’를 펴낸 백동호씨가 주인공. 전과자 출신인 백씨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만난, 소설 ‘실미도’의 주인공 강인찬씨(가명)가 실미도 훈련병 중 생존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백씨는 이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2년간의 취재를 통해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복원해 냈다.
애초 실미도 부대의 정원은 31명을 목표로 창설됐다. 68년 1월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던 김신조 일당의 박정희대통령 암살 기도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당시 김신조 일당의 숫자 31명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31명 중 3년의 훈련 기간에 모두 7명이 숨졌다. 항명을 기도했다가 처형당한 훈련병도 있고 인근 민가에서 강간 및 인질사건을 일으킨 뒤 자결한 훈련병도 있었다. 결국 사건을 일으킨 훈련병은 모두 24명. 그러나 이들이 민간 어선을 강탈해 인천에 상륙할 때 이들을 처음 발견한 당시 모사단 소속 605해안초소의 김형운일병이 보고한 훈련병 숫자는 21명이었다.
사건 당일 오후 1시20분경 당시 대간첩대책본부에 처음으로 보고된 난동자의 숫자도 21명. 결국 3명은 송도 해안에 상륙하기 전 어딘가로 달아났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백씨는 실미도 생존자의 주장을 근거로 “난동자들 대부분이 버스를 몰고 청와대로 직행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담판하자는 입장인 데 비해 이에 반대한 몇명이 난동범들의 대열에서 일찍이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들의 탈출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로부터도 비슷한 증언이 나오고 있다. 실미도와 300m 간격으로 마주보고 있던 무의도 해안에서 농장을 운영했던 이사원씨는 “당시 해변에서 낙지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군인 두어명이 무의도 남쪽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해 예비군이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잔당이 남아 있다는 별다른 흔적이 없자 잘못 본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갔다”고 증언했다.
생존자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또다른 정황도 있다.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난동자들이 자폭하고 난 9시간 뒤인 밤 11시40분경 인천시 옥련동 박모씨 집의 구멍가게에서 군복차림의 괴한이 집주인 박씨의 부인 문모씨를 향해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옥련동은 실미도에서 탈출한 난동범들이 버스를 탈취하는 등 이동경로에 위치한 지역이다. 백씨의 주장대로 24명 중 3명이 청와대행을 거부하고 중간에 이탈했다면 옥련동의 이 괴한이 바로 그들 중 한명인 셈이다.
만약 실미도 사건의 훈련병들 중 생존자의 신원이 드러난다면 이 사건의 실체와 당시 4년간 이 섬에서 벌어진 특수훈련의 실상을 둘러싸고 엄청난 논란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난동범들이 자폭할 때 극적으로 생존했던 훈련병 4명은 당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했기 때문에 훈련병 입장에서 실미도에서 벌어진 가혹한 훈련을 증언해 줄 사람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71년 8월23일 위장복을 입은 수명의 무장 괴한들이 인천에서 탈취한 버스를 몰고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해 난동을 부리다 자폭한 실미도 사건은 세상에 ‘군 특수범 난동 사건’이라고만 알려진 반란 사건이다. 당시 정래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등 고위 군 관계자들이 이 사건에 책임지고 줄줄이 옷을 벗었고 국회에는 진상 조사단이 구성됐다. 그러나 이 날 난동을 부리다가 자폭한 무장 괴한들이 대북 침투와 테러 목적으로 구성된 사형수와 무기수 등 비정규군 출신이었던 만큼 그 실체와 훈련내용 등에 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실미도 부대의 관리는 공군이 하고 있었지만 이 부대의 운명에 관해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공군참모총장도 국방부장관도 아닌 박정희대통령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 등 극소수의 고위 관계자에 불과했다.
소설 ‘실미도’를 쓰기 위해 관련 당사자들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한 백동호씨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중정에서 이들의 탈출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공비로 몰아 사살하려 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당시 정부는 애초 이들을 북한 무장공비라고 발표했다가 3시간반만에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이라고 정정해 그 배경을 둘러싸고 의구심을 산 바 있다. 중정이 이들을 무장공비로 발표한 뒤 이를 정정하는 3시간반 동안 박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이들을 공비로 몰아 전원 사살하려 했다는 주장은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다. 당시 부대 관리를 맡고 있던 공군은 물론 중정에서도 이 부대를 ‘버려진 부대’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미도 부대의 교육대장이던 김순웅준위의 부관을 맡았던 이준영씨는 “당시 교육대장은 훈련병들을 빨리 북한으로 보내든 교도소로 돌려보내든 뭔가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했다”고 증언했다. 이 부대가 소속된 공군 처지에서도 이대로 끌고갈 수만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군의 한 예비역 영관장교는 “당시 정보부대장 김재엽대령(작고) 등 공군 고위 관계자들은 중앙정보부에서 만들어 놓은 이 골칫거리 부대를 상부에 반납하기 위해 여러 차례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개 증언과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사건 수습에 관여했던 공군 관계자들은 사건 자체에 대한 언급을 일체 거부하고 있다. 당시 공군 정보부대장으로 난동사건 처리에 깊숙이 관여했던 김진각 예비역대령은 “국익과 관련되는 문제라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만 말했다.
공군 최고 관계자도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던 유령부대가 생겨난지 31년, 그리고 여순반란사건 이후 최대의 군사 반란이 일어난지 28년. 당시 관련자들의 공개 증언이 줄을 잇고 있지만 정작 책임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한 진실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서해의 이 무인도에서 ‘김일성주석 궁을 폭파하기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젊음의 노래는 그래서 금강산 유람선이 오가는 오늘까지도 계속된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김일성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