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교계의 여왕’ ‘마당발’ 등으로 불렸던 임창열 경기지사의 부인 주혜란씨. 그는 요즘 옥중에서 병마와 싸우면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씨는 먼저 풀려난 남편 임지사에 대한 일편단심을 보여주고 있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주씨는 경기은행 퇴출저지 로비사건으로 구속된 뒤 유방암이 재발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 그러나 10월5일 1심 선고공판에서 임지사만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자신은 실형을 받고 남게 됐다.
주씨는 1심 선고공판 며칠 전까지 자신의 구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그동안 담당재판부에 세 차례나 탄원서를 보내 “나는 하느님을 의지하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 왔다. 경기은행에서 돈을 받은 것은 완전히 우발적이었고 사태가 이렇게 심각할 줄 알았으면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또 과거 자신이 보건소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에이즈퇴치사업에 앞장서는 등 사회에 기여했던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주씨는 선고공판 일주일 전쯤 이번에 자신이 석방되지 못할 것을 예견한 듯 면회온 사람들에게 체념한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임지사를 걱정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주씨를 면회한 한 측근은 “주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내가 안나가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대신 임지사 문제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주씨는 또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도 임지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는 측근들에게 자주 “나 때문에 임지사가 더 어려움에 처한 것 같다”며 미안함을 토로한 뒤 “나보다는 임지사가 먼저 나가야 할텐데…”라며 임지사에게 잘해주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
검찰 관계자는 “주씨가 나이가 들면서 마땅히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느껴 임지사에게 더욱 매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지사는 구속후 주씨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직후에도 기자들이 주씨 문제를 거론하자 “할 말이 없다”며 답변을 피했고 그후에도 공식적으로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한 측근은“임지사가 풀려난 뒤 주씨에 대해 한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주씨가 없는 썰렁한 도지사 관사에서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라는 말로 임지사의 심정을 대변했다.
모두 초혼에 실패한 주씨와 임지사는 90년 12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면했다. 당시 임지사는 재무부 이재국장까지 승승장구하다 세계은행 이사로 좌천돼 미국에서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주씨는 잠시 미국에 들렀다가 여동생의 소개로 임씨를 만나 다음해 재혼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키가 큰 여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해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첫눈에도 시원시원해 보였다. 바로 나중에 내 아내가 된 주혜란씨였다. 나는 어머님께 닥터 주를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다.”(임지사의 자서전 ‘난파선의 키를 잡고’ 중에서)
“그의 첫인상은 시골아저씨처럼 수수하고 소박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해 보였다. 그때 내 나이 42세, 그는 47세였다.”(주씨의 미출간 자서전 ‘따뜻한 세상을 위하여’중에서)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후 주씨의 ‘튀는 행동’으로 충돌이 잦아지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주씨는 먼저 풀려난 남편 임지사에 대한 일편단심을 보여주고 있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주씨는 경기은행 퇴출저지 로비사건으로 구속된 뒤 유방암이 재발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 그러나 10월5일 1심 선고공판에서 임지사만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자신은 실형을 받고 남게 됐다.
주씨는 1심 선고공판 며칠 전까지 자신의 구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그동안 담당재판부에 세 차례나 탄원서를 보내 “나는 하느님을 의지하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 왔다. 경기은행에서 돈을 받은 것은 완전히 우발적이었고 사태가 이렇게 심각할 줄 알았으면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또 과거 자신이 보건소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에이즈퇴치사업에 앞장서는 등 사회에 기여했던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주씨는 선고공판 일주일 전쯤 이번에 자신이 석방되지 못할 것을 예견한 듯 면회온 사람들에게 체념한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임지사를 걱정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주씨를 면회한 한 측근은 “주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내가 안나가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대신 임지사 문제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주씨는 또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도 임지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는 측근들에게 자주 “나 때문에 임지사가 더 어려움에 처한 것 같다”며 미안함을 토로한 뒤 “나보다는 임지사가 먼저 나가야 할텐데…”라며 임지사에게 잘해주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
검찰 관계자는 “주씨가 나이가 들면서 마땅히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느껴 임지사에게 더욱 매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지사는 구속후 주씨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직후에도 기자들이 주씨 문제를 거론하자 “할 말이 없다”며 답변을 피했고 그후에도 공식적으로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한 측근은“임지사가 풀려난 뒤 주씨에 대해 한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주씨가 없는 썰렁한 도지사 관사에서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라는 말로 임지사의 심정을 대변했다.
모두 초혼에 실패한 주씨와 임지사는 90년 12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면했다. 당시 임지사는 재무부 이재국장까지 승승장구하다 세계은행 이사로 좌천돼 미국에서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주씨는 잠시 미국에 들렀다가 여동생의 소개로 임씨를 만나 다음해 재혼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키가 큰 여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해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첫눈에도 시원시원해 보였다. 바로 나중에 내 아내가 된 주혜란씨였다. 나는 어머님께 닥터 주를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다.”(임지사의 자서전 ‘난파선의 키를 잡고’ 중에서)
“그의 첫인상은 시골아저씨처럼 수수하고 소박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해 보였다. 그때 내 나이 42세, 그는 47세였다.”(주씨의 미출간 자서전 ‘따뜻한 세상을 위하여’중에서)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후 주씨의 ‘튀는 행동’으로 충돌이 잦아지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