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다룬 책이라면 선진국 디자인 상품의 원색 화보집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디자인문화비평’ 첫호가 주는 인상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전혀 시선을 붙잡을 뜻이 없어보이는 표지디자인이 그렇고, 그 무표정한 제목이 또 그렇다.
그러나 독자들은 곧 점잖게 생긴 책 안에 88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가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상학과 교수님들이 만든 ‘예술의상’들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표지 제목 ‘디자인문화비평’도 얇은 선으로-면도날로-잘라져 있다. 편집인인 김민수 전서울대교수는 생생한 문화적 논의를 하기 위한 ‘칼날과 몸’이 되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고 설명한다.
유달리 인맥과 학맥이 중요한 미술계에서 ‘칼날’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호돌이’의 모습이 어색하다는 생각들을 하면서도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공공미술의 이름으로 ‘문패 조각’들을 납품하며 작가들에게 ‘꺾기’를 강요해 온 화랑들을 모두들 모른 체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부정기 간행물이 될 ‘디자인문화비평’의 첫호 특집이 ‘우상, 허상 파괴’에 주어진 것은 이처럼 전근대적인 관습, 학문과 인맥으로 얽힌 먹이사슬, 우상숭배적 생산논리 등에 의해 썩어가는 디자인 미술계의 환부를 도려내겠다는 단호함의 표현일 것이다. ‘우상, 허상 파괴’의 첫번째 글 ‘도상과 우상’을 쓴 이정구교수(성공회대 신학부)는 신학자의 시각에서 왜 우리의 교회는 모두 뾰족탑을 숭배하는지 설명한다. 성완경교수(인하대 미술교육과)의 ‘한국 공공미술의 허상과 위기’는 포스코사옥 앞의 ‘아마벨’을 들어 우리 공공미술 제도의 난맥상을 드러낸다. 김민수교수는 ‘호돌이의 뿌리와 그림자:한국 그래픽디자인의 정체성’을 통해 호돌이와 88올림픽 휘장 디자인이 디자인에 대한 성찰없이 ‘단지 자와 콤파스로 단순화한 형태’로, 소위 ‘한국성’이 우리 디자이너들을 어떻게 구속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통찰한다. 같은 특집에서 김성복교수(한성대 예술대학)는 지난 여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옷, 그 겉과 안’전이 대중에게 패션과 미술의 개념을 아무렇게나 섞어 보여준 ‘농약 칼국수’전이라고 말한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더이상 이런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호돌이라는 디자인은 공공의 재산입니다. 그동안 디자인, 미술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자산이 공적인 장에서 논의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김민수교수)
사실 대통령이 ‘디자인이 경제를 살리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언급한 이후 디자인은 경제난을 타개할 수 있는 ‘비법’처럼 간주돼 왔다. 그러나 ‘디자인문화비평’은 정작 한국 디자인의 국제경쟁력 상실이 ‘껍데기 포장술’을 디자인으로 생각한 데 있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은 디자인으로 나라가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 이전의 삶과 디자인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문화비평’의 관심은 상품, 광고, 만화, 시각 커뮤니케이션 등 모든 인위적 생산물뿐 아니라 그것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접점’에 모아질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시각 이미지를 읽어낸다는 것은 예술과 인문학, 과학과 기술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디자인문화비평’은 이 다양한 학문들을 삶이 부딪치는 실천적 영역에서 ‘네트워킹’하려는 야심찬 작업의 첫 발인 셈이다.
디자인문화실험실 기획 편집/ 안 그라픽스 펴냄/ 192쪽/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