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이에 따라서는 매우 도발적이고 전투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한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의 주제는 ‘21세기에는 여성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지난 10월21일 서울 호텔롯데에서 전문직여성클럽(BPW) 한국연맹(회장 서영희 선문대 부총장)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세미나다.
세미나를 위해 모인 사람들도 자못 흥미로웠다. 기조연설을 중앙인사위원회 김광웅위원장이 맡은 것부터 그랬다. 김옥렬 전숙명여대총장이 사회를 맡은 토론자리에는 국민회의 김근태의원, 고려대 함성득교수(대통령학), 청와대 장성민 국정상황실장,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장 등 4명의 남성과 박금옥 전여기자협회회장, 이화여대 조기숙교수(국제정치학) 등 6명이 참가했다.
여성투표는 있어도 女權투표는 없다
먼저 김광웅위원장은 ‘여성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보다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 좀더 여유있고 합리적이며, 덜 성차별적이지 않느냐는 말로 기조연설을 시작했다. 이어 김위원장은 “현재 386세대들이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을 자처하며 앞으로 이 나라 정치를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데, 80년대 군부독재하에서 학생 신분으로 투쟁한 여성 지도자들의 향배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여성 소외의 사정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세대가 바뀌어도 별로 변하지 않는 남성 중심적 한국 정치의 실태를 지적했다. 김위원장은 또 토론자로 참여한 장성민 국정상황실장이 최근에 번역한 책 ‘지도력의 원칙’에 등장하는 열가지 지도력의 원칙, 즉 설득력 인내심 상냥함 학습력 포용력 친절함 지식 자제력 일관성 성실함 등의 덕목에서 여성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위원장에 이어 주제발표를 한 조기숙교수는 1998년 유엔의 ‘인간개발보고서’를 인용, 한국의 경우 여성세력화지수는 102개국 중 83위로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면서 “사회 각 부문에서 여성의 능력이 신장되고 참여가 활성화되어도 정치세력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여성투표’는 있어도 ‘여권(女權)투표’(여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는 없다는 것. 조교수는 그러나 △정보화와 대중매체의 발전 등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여성적 특질이 우성으로 간주된다는 점 △냉전 종식과 세계화의 결과 군사와 안보를 강조하는 상위정치는 퇴조하고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강조하는 하위정치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는 사실 △세계적인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관심의 확대 등으로 ‘21세기에는 여성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토론에 나선 김근태의원은 “한국에서는 특이하게도 여성의 권익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에 여성들이 반대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조교수의 주장을 인정하지만 정치 중심이 자동적으로 여성에게 넘어간다는 논리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장성민 국정상황실장은 “일본의 오부치는 남성이지만 여성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총리에 재선됐고,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는 여성이지만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남성적 리더십이 강해 선거에 실패했다”면서 “앞으로 100년내에 여성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참으로 가망이 없는 나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장실장은 또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그동안의 부패나 스캔들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어, 부드럽고 깨끗하며 신뢰감을 주는 여성 지도력이 정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함성득교수는 “여성 대통령이 나오기 위해서는 고위직 관료나 정계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해야 하고,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대통령부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함교수는 “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기용에 힐러리의 영향력이 발휘된 것처럼 이제 우리나라도 대통령부인은 소리나지 않게 내조나 봉사활동만 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통령의 ‘제1 심복’으로서 자신의 경륜과 전문성을 살려 정책에 직접 관여하는 적극적인 대통령부인상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제프리 존스 소장은 “여성의 정치력 확대를 위해서는 가정이 먼저 바뀌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남성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