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지?’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흔히, 그리고 끊임없이 제기돼 온 상징적인 질문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개미Z’에서 주인공 Z(그의 성격에 걸맞게 우디 앨런이 목소리를 연기한다)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일이 더 나은 개미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나는 뭐지?”
Z는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거대한 개미왕국 속에서, 나는 더없이 하찮은 존재 같아요.”
“당신은 하찮은 존재요.” 의사는 그 사실을 확신시킨다. 그러한 ‘깨달음’이, Z로 하여금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도록 이끌 것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Z가 보여준 반응 그대로다. ‘남들은 내 진면목을 몰라. 기회만 돼 보라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지,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거야…’ 그것은 우리가 각자 지닌 은밀한 꿈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1등공신’
‘나’에 대한 물음은 지난 1000년간의 신념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로 인식된다. 세계가 ‘신앙의 바다’(매슈 아놀드의 표현이다)로 넘실대고 신이 그 중심에서 안식하던 시절에는 ‘나는 뭐지?’라는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중세의 인식체계에서, 개인이란 한갓 신의 성스러운 뜻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세의 인식은,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격변을 만나게 된다. 신은 우주의 아득한 변경으로 밀려나고 만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밝힌 코페르니쿠스, 행성들의 항로는 완벽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증명한 케플러, 망원경을 발명하고 제1운동법칙을 창안한 갈릴레오, 중력 이론으로 세상의 운동법칙을 다시 쓴 뉴턴 등은 그들의 본래 의도야 어떻든 고대와 중세 시대의 전지전능했던 신을 축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처음에는 올림푸스산으로부터, 그리고 마침내는 천상(天上)으로부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에 의해 신이 기계로 대체되자마자 새로운 고민거리가 떠오른 것이다. 신이 쫓겨난 자리, 윤리적 질서가 무너진 자리를 무엇으로 대신할 것인가. 매슈 아놀드는, 박약하나마 인본주의로 이를 채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오 사랑이여,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니, 그보다는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모든 사랑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The Greatest Love of All)이라고 노래한 휘트니 휴스턴 쪽이 더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그 본질을 짚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사라진 자리, 무너진 것은 윤리적 질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삶의 목적과 지혜를 구할 것인가. 우리 자신에게서? 아니면 우리의 자아(自我·self)로부터?
에머슨은 말한다. “마침내 성스러운 것은 당신 자신의 마음 속에 깃들인 고결성밖에 없다… 그대 자신을 믿으라.”
우리는, 걱정은 잠시 젖혀둔 채 그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은 그 대표적인 증거다. 좋건 궂건, 심지어 자의식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데니스 로드맨(미 프로농구의 소문난 악동) 같은 결과로 나올지라도 우리는 자의식에 깃들인 선(善)과 영광을 찬양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나’와 ‘우리’, 혹은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다. 그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은 늘 있어 왔지만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인종이나 성, 성적 지향, 혹은 연대의 필요성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배관공들은 조합에 들고, 변호사들은 법정에 모여든다. 백만장자 코치는 억만장자 프로야구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 경기는 ‘나’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설득하며, 선수들은 감독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신용카드 회사는 갖가지 ‘특전’을 열거하며 회원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한 밀레니엄의 끝자락에서, 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닌 ‘나’뿐임을 깨닫는다. 어린이들도 이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시카고 불스를 ‘위해’ 뛰는 선수가 아니라 또다른 마이클 조던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주의가 전적으로 건강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로 대별되는 집단에 대한 불신보다는 훨씬 더 나은 편이다. ‘우리’, 혹은 집단은 다수(多數)라는 조건에서 더 힘있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의심스러운 권력이고 경멸스러운 안전이다. 집단이 클수록 관료주의도 더 커지며,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그 집단의 효율성은 더 떨어진다. 할리우드의 예를 보자. 대형 스튜디오들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형편없을까. 거대 자본의 타락한 영향력 때문일까. 영화사 사장들의 아집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한편 출연료로만 수천만달러씩 요구하는 스타들의 빗나간 이기주의 때문일까.
세기말 다시 진정한 ‘나’를 찾자
답은 ‘아니오’다. 문제는 ‘단일하고 일관된’ 시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 영화를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는 각본을 쓰고, 프로듀서의 조언에 따라 다시 고쳐 쓴다. 영화사 간부의 의견에 맞춰 다시 내용을 수정하고, 감독의 견해에 따라 또다시 내용을 바꾼다. 인기 스타도 내용 변경에 한몫한다. 영화 촬영이 다 끝난 뒤에도 수정은 그치지 않는다. 편집자가 손질하고, 감독이 깁고, 시사회 관객 의견이 또다시 영화를 굴절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가, 어떻게 ‘예술’일 수 있겠는가.
책들이, 대체로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책에서는 한 개인의 내밀한 감성과 지성이 독자인 또다른 한 개인의 감성과 지성 속으로 친밀하게 전달된다. 적어도 예술에 관한 한, 여러 사람이 참여한 공동작업의 결과보다는 도리어 한 개인의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지는 사례인 것 같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것을 접하는 개개인의 내밀한 마음 속에 자리잡은 자의식을, 혹은 양심을 일깨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허클베리 핀이 오랜 번민 끝에 마침내 법정에 서서 진실을 말할 때, 그는 곧 우리 자신의 양심이 된다. 감독 겸 배우인 우디 앨런이 소심하고 불안한 어조로 “나, 나는… 내 생각에는… 내가 보기에는…” 하며 더듬거릴 때, 그것은 도리어 우리 자신의 자의식을 일깨우는 완전한 문장처럼 들린다.
우리는, 마침내 밀레니엄의 끝자락에 섰다. ‘내가 중심인 우주’에서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달려온 이 방향이 과연 옳은 것인지, 또는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가 됐다. 물론 그 결과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중세의 질서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의 시대, 왕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의식과 유아론(唯我論)의 필연적인 종말?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뭐지?”라는, 실질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질문을 고민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분명히 무엇인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Z는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거대한 개미왕국 속에서, 나는 더없이 하찮은 존재 같아요.”
“당신은 하찮은 존재요.” 의사는 그 사실을 확신시킨다. 그러한 ‘깨달음’이, Z로 하여금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도록 이끌 것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Z가 보여준 반응 그대로다. ‘남들은 내 진면목을 몰라. 기회만 돼 보라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지,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거야…’ 그것은 우리가 각자 지닌 은밀한 꿈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1등공신’
‘나’에 대한 물음은 지난 1000년간의 신념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로 인식된다. 세계가 ‘신앙의 바다’(매슈 아놀드의 표현이다)로 넘실대고 신이 그 중심에서 안식하던 시절에는 ‘나는 뭐지?’라는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중세의 인식체계에서, 개인이란 한갓 신의 성스러운 뜻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세의 인식은,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격변을 만나게 된다. 신은 우주의 아득한 변경으로 밀려나고 만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밝힌 코페르니쿠스, 행성들의 항로는 완벽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증명한 케플러, 망원경을 발명하고 제1운동법칙을 창안한 갈릴레오, 중력 이론으로 세상의 운동법칙을 다시 쓴 뉴턴 등은 그들의 본래 의도야 어떻든 고대와 중세 시대의 전지전능했던 신을 축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처음에는 올림푸스산으로부터, 그리고 마침내는 천상(天上)으로부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에 의해 신이 기계로 대체되자마자 새로운 고민거리가 떠오른 것이다. 신이 쫓겨난 자리, 윤리적 질서가 무너진 자리를 무엇으로 대신할 것인가. 매슈 아놀드는, 박약하나마 인본주의로 이를 채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오 사랑이여, 우리가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니, 그보다는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모든 사랑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The Greatest Love of All)이라고 노래한 휘트니 휴스턴 쪽이 더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그 본질을 짚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사라진 자리, 무너진 것은 윤리적 질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삶의 목적과 지혜를 구할 것인가. 우리 자신에게서? 아니면 우리의 자아(自我·self)로부터?
에머슨은 말한다. “마침내 성스러운 것은 당신 자신의 마음 속에 깃들인 고결성밖에 없다… 그대 자신을 믿으라.”
우리는, 걱정은 잠시 젖혀둔 채 그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은 그 대표적인 증거다. 좋건 궂건, 심지어 자의식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데니스 로드맨(미 프로농구의 소문난 악동) 같은 결과로 나올지라도 우리는 자의식에 깃들인 선(善)과 영광을 찬양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나’와 ‘우리’, 혹은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다. 그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은 늘 있어 왔지만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인종이나 성, 성적 지향, 혹은 연대의 필요성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배관공들은 조합에 들고, 변호사들은 법정에 모여든다. 백만장자 코치는 억만장자 프로야구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 경기는 ‘나’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설득하며, 선수들은 감독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신용카드 회사는 갖가지 ‘특전’을 열거하며 회원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한 밀레니엄의 끝자락에서, 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닌 ‘나’뿐임을 깨닫는다. 어린이들도 이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시카고 불스를 ‘위해’ 뛰는 선수가 아니라 또다른 마이클 조던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주의가 전적으로 건강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로 대별되는 집단에 대한 불신보다는 훨씬 더 나은 편이다. ‘우리’, 혹은 집단은 다수(多數)라는 조건에서 더 힘있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의심스러운 권력이고 경멸스러운 안전이다. 집단이 클수록 관료주의도 더 커지며,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그 집단의 효율성은 더 떨어진다. 할리우드의 예를 보자. 대형 스튜디오들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형편없을까. 거대 자본의 타락한 영향력 때문일까. 영화사 사장들의 아집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한편 출연료로만 수천만달러씩 요구하는 스타들의 빗나간 이기주의 때문일까.
세기말 다시 진정한 ‘나’를 찾자
답은 ‘아니오’다. 문제는 ‘단일하고 일관된’ 시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 영화를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는 각본을 쓰고, 프로듀서의 조언에 따라 다시 고쳐 쓴다. 영화사 간부의 의견에 맞춰 다시 내용을 수정하고, 감독의 견해에 따라 또다시 내용을 바꾼다. 인기 스타도 내용 변경에 한몫한다. 영화 촬영이 다 끝난 뒤에도 수정은 그치지 않는다. 편집자가 손질하고, 감독이 깁고, 시사회 관객 의견이 또다시 영화를 굴절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가, 어떻게 ‘예술’일 수 있겠는가.
책들이, 대체로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책에서는 한 개인의 내밀한 감성과 지성이 독자인 또다른 한 개인의 감성과 지성 속으로 친밀하게 전달된다. 적어도 예술에 관한 한, 여러 사람이 참여한 공동작업의 결과보다는 도리어 한 개인의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지는 사례인 것 같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것을 접하는 개개인의 내밀한 마음 속에 자리잡은 자의식을, 혹은 양심을 일깨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허클베리 핀이 오랜 번민 끝에 마침내 법정에 서서 진실을 말할 때, 그는 곧 우리 자신의 양심이 된다. 감독 겸 배우인 우디 앨런이 소심하고 불안한 어조로 “나, 나는… 내 생각에는… 내가 보기에는…” 하며 더듬거릴 때, 그것은 도리어 우리 자신의 자의식을 일깨우는 완전한 문장처럼 들린다.
우리는, 마침내 밀레니엄의 끝자락에 섰다. ‘내가 중심인 우주’에서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달려온 이 방향이 과연 옳은 것인지, 또는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가 됐다. 물론 그 결과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중세의 질서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의 시대, 왕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의식과 유아론(唯我論)의 필연적인 종말?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뭐지?”라는, 실질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질문을 고민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분명히 무엇인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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