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발레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발레 관련 전문용어를 살펴보면 모두 프랑스어다. 무릎을 부드럽게 구부리는 동작은 쁠리에(Plie), 발끝을 바닥에 닿게 한 뒤 다리를 앞·옆·뒤로 뻗는 동작은 땅뒤(Tendu)라고 한다. 두 무용수가 함께 추는 춤을 일컫는 빠 드 되(Pas de Deux)도 있다. 발레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궁정에서 시작됐지만 형식과 기법은 17세기 프랑스에서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프랑스에서 발전한 발레가 어떻게 러시아에서 만개할 수 있었을까.

프랑스 왕실 후원으로 번성한 발레

프랑스 루이 14세는 발레를 예술의 중심으로 삼아 프랑스 발레의 특징을 확립했다.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영화 ‘왕의 춤’에는 젊은 루이 14세가 태양신 아폴로의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귀족들은 “태양왕 만세”를 부르며 그를 우러러본다. 세상의 중심인 군주 모습을 드러내는 데 이보다 좋은 캐릭터는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주먹을 꽉 쥐고 발을 강하게 딛는 모습은 무술 동작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과거 발레는 프랑스 왕실의 후원 아래 번성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실이 붕괴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왕립 무용 아카데미 운영이 어려워졌고 전문 무용수들의 생계도 힘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 러시아가 프랑스 무용수들에게 희망이 됐다. 러시아 왕실은 프랑스 무용수들을 초청했고, 그중 다수는 러시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발레는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러시아 왕실은 프랑스 ‘발레 마스터’들을 초대해 발레 학교를 설립했고, 러시아 문화와 예술에 발레를 접목했다. 서유럽 영향을 많이 받은 러시아 발레는 점차 독창적 스타일과 기술을 개발해나갔다. 특히 서구화를 추구한 표트르 대제의 노력으로 그 기반이 마련됐다.

러시아는 군사훈련에도 발레를 채택했다. 19세기부터 군인들의 신체 훈련과 자세 교정에 발레를 활용한 것이다. 군인들에게 발레를 시킨 주된 목적은 유연성, 균형감각, 신체 조절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발레 훈련은 군인들의 몸매를 개선했고, 균형 잡힌 신체 움직임도 가능케 했다. 특히 정신 집중력과 인내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가령 ‘풀 업’(끌어올리기)이라는 동작을 살펴보자. 발로 땅을 밀어내면서 엉덩이를 조이고 허벅지 근육에 힘을 주는 자세다. 이때 배를 집어넣고 갈비뼈를 조이며 어깨는 내려야 한다. 동시에 머리는 위로 쭉 올리고, 양팔은 온 세상을 품듯 쫙 늘린다. 이 동작을 일상에서 의식하며 실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살이 빠지고 균형 잡힌 몸매가 유지된다. 물론 외국 발레수업에 가보면 배가 나오고 뚱뚱한 중년 아저씨도 가끔씩, 아니 자주 보인다. 몸매가 좋은 사람만 무용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다.

결과적으로 발레를 통한 군사훈련은 러시아 발레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대에서 실용적 접근은 발레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됐고, 발레의 기술적·예술적 측면이 체계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발레는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시기 러시아 발레단은 독창적인 스타일과 표현을 개발해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과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은 러시아 발레의 중심이었다. 이들은 투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러시아 발레, 미국으로 건너가 혁신 이뤄

러시아 발레단은 혁신적 안무, 음악, 무대 디자인을 선보였으며 미국 발레와 무용 전반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발레단의 미국 투어는 미국 내에서 발레 인기를 크게 끌어올렸고, 특히 세르게이 댜길레프의 발레단은 혁명적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발레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은 미국 발레학교 및 관련 단체에서 교육을 맡아 러시아 발레 기술과 예술성을 미국에 전파했다. 이후 조지 발란친, 제롬 로빈스, 마사 그레이엄 같은 안무가가 미국 발레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결국 미국 발레는 기술적 정밀함과 감성적 표현의 균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 발레는 미국 현대무용에도 영향을 미쳐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작품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영화가 바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그레고리 하인스,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출연한 ‘백야’다. 영화에서 바리시니코프의 발레도 멋지지만 하인스의 신들린 탭댄스도 볼만하다. ‘Prove Me Wrong’ 음악에 맞춰 두 주인공이 춤추는 장면은 최고다.

오늘날 발레를 배운 유명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휴 잭맨, 내털리 포트먼 같은 배우나 연예인 외에도 각계에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공동창립자 겸 최고경영자(CEO)도 발레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예술과 운동이 창의력과 집중력을 높인다고 강조하며 이를 사업 경영에 접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젊은 시절 발레 수업을 받았다. 트뤼도 총리는 발레를 통해 자신감과 몸매를 가꾸는 방법을 배웠으며, 이 경험이 리더십 개발에도 기여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발레에서 말하는 바른 자세는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발바닥 전체로 땅을 힘껏 누른다. 둘째, 배에 힘을 주고 척추를 머리에서 잡아당기듯 최대한 똑바로 펴 일직선으로 세운 뒤 머리와 턱을 당긴다. 셋째, 어깨를 위로 올려 뒤로 보낸 후 양쪽 견갑골을 붙여 안쪽으로 모으고 밑으로 당긴다. 이 세 자세를 연습하면서 발레에 한 걸음 다가가보는 것은 어떨까.

_{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