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1일 낮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의 1등 항해사인 이모 서기가 서해 소연평도 남방 2km 해상에서 실종됐다. 사진은 소연평도. [동아db]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명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사회계약설을 설명하면서 국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축약해 설명한 말이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합체’해 만든 거대한 몸에 거대한 칼을 쥔 혼돈의 상징이지만,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여러 사람의 집합체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로 묘사했다.
홉스가 지적한대로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을 지키는 것이다. 국가가 그 의무에 최선을 다할 때, 국민들은 국가에 충성하며 국가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며, 반대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의무를 저버렸을 때 그 국가는 쇠락하고 무너진다. 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미국이고, 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북한을 비롯한 공산 전체주의 독재국가들이다.
부끄럽고 치욕적인 날
2020년 9월 22일은 대한민국이 국가의 의무를 저버린,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부끄럽고 치욕적인 날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국민, 그것도 국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던 공무원이 실종돼 북한까지 표류했고, 그 곳에서 총살된 것은 물론 시신 유기를 당하는 상황을 국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관했다. 심지어 희생자를 ‘월북자’로 몰아 고인의 명예까지 짓밟는 초유의 작태를 보였기 때문이다.이번 사건은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의 1등 항해사인 이모 서기가 9월 21일 낮 12시 51분, 서해 소연평도 남방 2km 해상에서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되면서 시작됐다. 동승 선원들은 점심시간인 11시 30분께 배 어디에서도 이 서기가 보이지 않아 선체를 수색했지만 선미(船尾) 우현(右舷)에서 그의 슬리퍼 한 짝을 발견하고 해양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경남 양산에 거주하는 그는 아내와 자녀 2명이 있으며, 평소에는 목포 관사에 살며 이따금씩 딸과 아들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살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사건 직후 당국은 그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고, 바다에 빠진 뒤 부유물을 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월북자로 몰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실종되던 시각, 그가 타고 있던 무궁화 10호의 선내 CCTV는 고장 나 있었다.
실종된 이 서기가 왜 등산곶 앞바다에서 발견됐는지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군 당국은 22일 오후 3시 40분, 특수정보(SI : Special Intelligence)를 통해 이 서기가 실종 지점인 소연평도 남방 2km 해역에서 서북방으로 30km 떨어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등산곶 인근 해역에서 북한 수산사업소 선박에 의해 발견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군 당국은 “북한 수산사업소 소속 선박이 22일 오후 3시 40분께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1명 정도 탈 수 있는 부유물에 탑승한 기진맥진한 상태의 실종자를 최초 발견한 정황을 입수했다”면서 “이때부터 북한 선박이 실종자와 일정 거리를 이격한 상태에서 방독면을 착용한 뒤 표류 경위와 월북 관련 진술을 들었으며, 상부 지시를 받은 북한군 단속정이 나타나 22일 오후 9시 40분께 이 서기에게 사격을 가해 사살했고,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불에 태워 훼손한 시각은 22시 10분”이라며 사건의 발생 순서를 분 단위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인했다.
22개소의 감청 기지
9월22일, 이 서기가 어떻게 희생됐는지 군 당국이 이렇게 소상히 알고 있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SI’ 때문이다. 군은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산하에 일명 ‘쓰리쎄븐부대(777부대)’로 불리는 대북 감청기관을 운영 중이다. 경기도 성남에 본부를 두고 주요 전방 지역에 감청 전력을 파견해 놓고 있는 이 부대는 매일 북한군이 주고받는 거의 모든 통신을 감청해 녹음하는데, 지난 2006년 미 국가안보국(NSA) 보고서에 따르면, 777부대는 국내 22개소에 감청 기지를 설치해 하루 7만7000분(1283.3시간) 분량의 녹음 자료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북한군의 거의 모든 무선 통신을 감청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군은 전방 지역에서 움직이는 북한군의 모든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인지할 수 있다.
베일에 가려진 이 부대의 이름이 매스컴에 등장한 것은 지난 2002년 10월 4일, 국회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이 부대 사령관을 맡고 있는 한철용 소장(육사 26기)이 ‘블랙 북(Black Book)’을 들고 나와 제2연평해전의 비밀을 폭로한 사건 때였다.
당시 한 사령관은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발생 전인 6월 17일과 27일에 북한군 통신을 감청해 일선 북한군에 발포 명령이 하달됐으며, NLL을 수시로 넘어오던 북한 경비정에 도발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북한의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보고를 묵살하고, 북한 경비정의 NLL 월선을 도발 목적이 아닌 단순 침범으로 수정해 보고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한 사령관은 폭로했다.
당시 한 사령관이 공개한 SI는 ‘해안포 발포 준비 중이니 방심 말 것’과 ‘발포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는 북한군 통신 전문이었다. 18년 전 제2연평해전 당시에도 우리 군은 북한의 모든 통신 내용을 감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장비가 더욱 보강된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강력한 감청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증명한 것이 지난 5월 3일,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DMZ) 제3보병사단 GP 총격 사건 때였다. 당시 군 당국은 언론이 북한군의 조준 사격과 고의 도발 가능성을 제기하자, 북한군 통신 내용 중 ‘총기 관리에 신경 쓰라’ 등 SI 정보를 일부 흘리며 당시 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해명했었다. 군 당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전후방 각지의 북한군 말단 제대의 통신까지 모두 감청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북한이 등산곶 앞바다로 표류해온 이 서기의 존재를 인지해 상부와 통신을 주고받을 때도 이 사실을 실시간으로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부와 군 당국은 북한이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국경 전역에 “국경에 접근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사살하라”는 스탠딩 오더를 내려놓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북한 주민과 중국인이 국경선에 접근하다가 북한군의 사격으로 살해됐다는 소식도 언론을 통해 여러 번 전해졌기 때문에 모른다는 변명은 통할 수가 없다. 따라서 당국은 북한의 관용선이 표류 중인 이 서기를 발견하고 그에게 접근한 22일 3시 40분, 북한이 이 서기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대응에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 그 누구도 이 서기를 구하려 나서지 않았다. 북한 수산사업소 선박이 이 서기에게 접근할 때도 당국은 보고만 있었고, 당연히 무선 통신으로 사살 명령을 받았을 북한군 단속정이 무장한 채 이 서기에게 접근할 때도, 북한군이 무방비 상태로 쓰러진 이 서기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할 때도, 심지어 북한이 고인의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일 때도 대한민국 정부 그 누구도 이 서기를 위해 무언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게 나라냐?”
문재인 대통령(왼쪽에서 세 번째)이 9월24일 오후 경기 김포시 민간 온라인 공연장인 캠프원에서 열린 디지털뉴딜문화콘텐츠산업 전략보고회에 참석해 아카펠라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 국민들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사진을 통해 똑똑히 보았겠지만, 이번 사건이 발생한 등산곶 앞바다는 인근 해역을 오가는 우리 해군 선박은 물론 연평도에서도 다양한 수단을 통해 촬영이 가능한 곳이다. ‘국경 접근자는 이유 불문 사살’이라는 스탠딩 오더가 하달돼 있고, 그런 상황에서 북한군이 표류 중인 우리 국민에게 접근하는 장면이 관측됐다면 정부는 이유 불문하고 구출 작전에 나섰어야 했다.
북한에 즉각 경고 방송을 보내고 움직였어야 했다. 군함과 전투기를 띄워 무력시위를 해서라도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위협하지 못하게 묶어두고 즉시 고속단정이나 특수부대를 보내 적 지역에 고립돼 있는 우리 국민을 구해 왔어야 했다. 연평도 인근에 떠 있는 800억 원이 넘는 유도탄 고속함, 1100억 원이 넘는 F-15K 전투기 같은 무기들은 그러라고 국민들이 사준 것이다. 그것들을 지휘하는 고위 공무원들, 군인들은 그러라고 국민들이 월급 주는 것이다.
정부의 방관 속에서 차가운 바다 위에서 무참히 희생된 이 서기는 2012년 해양수산부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로 우리 바다와 어민들을 지키기 위해 8년을 바다 위에서 헌신해 온 공무원이었다. 원양어선을 타다가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공무원이 됐고, 공부 잘하는 중학생 아들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자랑하는 낙으로 살던 훌륭한 가장이자 아빠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소중한 국민이었다.
지금 정부는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며 “이게 나라냐”는 구호를 외치며 국민들의 분노를 정권 교체의 동력으로 삼아 집권한 정권이다. 그런 정권이 적에 의해 국민이 살해당하고 시신이 훼손되는 참혹한 모습을 6시간 넘게 지켜만 보고 있었고,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참석은 고사하고 밖에 나가 아카펠라 공연을 관람했다. 국민 보호라는 국가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를 등진 이 정권에게 이제 국민이 물을 차례다. “이게 나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