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의 운학문양을 재해석해 만든 국립중앙박물관 굿즈. [사진제공 ․미미달]
얼마 뒤 일본인 수집가는 전형필을 다시 찾아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자신에게 되팔라고 제안했다. 4만원에 청자를 사들이겠다는 다른 수집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간송 전형필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보다 더 뛰어난 청자를 가지고 온다면 이 매병을 구입한 가격 2만 원에 그대로 드리겠소”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85년이 흐른 지금,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운학문양이 21세기 신(新)문물에서 재탄생했다. 7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출시해 화제를 모은 ‘청자상감운학문 굿즈’가 그 주인공이다. 운학문양은 스마트폰 케이스(1만9000원)와 무선이어폰 케이스(1만8000원)에 곱게 새겨졌다. 해당 굿즈는 출시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9월 초에는 주문 폭주로 국립중앙박물관 온라인 뮤지업샵 온라인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주문이 밀려 배송도 2주 이상 지연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박물관이 휴관 중이라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구입할 수 없다.
박물관 관계자에 따르면 휴대전화 케이스는 9월 28일 기준 4000개 이상 판매됐다. 그 덕에 온라인 뮤지엄샵 9월 매출도 8월 대비 약 200%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굿즈는 일반적으로 문화 컨텐츠에서 파생된 상품을 의미한다. 80·90년대 유행하던 연예인 책받침부터 최근 10대 팬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돌 사진 휴대전화케이까지 모두 ‘굿즈’에 해당한다. 그 밖에도 특정 캐릭터나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 필기구, 머그컵 등 실용성 높은 품목들도 굿즈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
고려청자 굿즈의 인기비결은 전통미와 실용성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청자라는 자칫 ‘올드’ 할 수 있는 문화재를 젊은 감성으로 재해석 하는 동시에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디바이스 아이템으로 실용성까지 챙겼다. 고려청자 굿즈 제작업체 ‘미미달’의 한상미 대표는 고객들로부터 “내가 알던 고려청자가 이런 매력이 있는지 몰랐다”, “고려청자에 대해 다시 알게 됐다”는 평을 주로 듣는다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서도 고려청자 굿즈는 힙한 아이템으로 통한다. ‘고려청자 특유의 비색의 색감을 잘 살렸다’는 호평이 주를 이룬다.
신진 작가들에게 기회 부여
고려청자 굿즈가 팔리고 있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내 뮤지엄샵.
최근 뮤지엄샵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박물관은 젊은 작가와 중소 디자인 업체들을 위한 일종의 플랫폼 역할도 한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뮤지엄샵을 전담하고 있는 김미영 사업개발 팀장은 “최근 젊은 디자이너들이 이끄는 신생업체와 작은 기업들의 공모전 지원이 부쩍 늘고 있으며 재단도 이런 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밝혔다. 고려청자 케이스를 제작한 업체 미미달도 2019년 초에 설립된 신생업체다.
박물관 굿즈의 인기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2017년 SNS상에서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시구를 새긴 텀블러가 크게 인기몰이를 한 게 대표적이다. 이후 온· 오프라인 상에서 박물관 굿즈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성공에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숨은 노력이 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굿즈 마케팅이 본격화 되기 이전인 2015년부터 뮤지업샵 상품 개발에 나섰다. 김 팀장은 “5~6년 전부터 젊은 고객층 사이에서 문화재에서 착안한 기념품의 수요가 증가하는 것을 포착하고 이들이 좋아할만한 상품을 개발하고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해왔다”고 설명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뮤지엄샵 내에서 젊은 관객을 위한 다양한 기획전과 이벤트도 수시로 열고 있다. 온라인 홈페이지도 리뉴얼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등 젊은 세대의 감각과 트렌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수치로도 증명된다. 2015년과 비교해 매출이 5년 만에 60% 이상 성장했다. 2019년 뮤지엄샵 연간 매출은 86억 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해외 매출도 증가하고 있어 사업 확장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미술관, 굿즈 사업으로 수익 창출
한국의 국공립 박물관의 경우 소장품 위주의 전시인 상설전은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다. 반면 뮤지엄샵은 박물관이 수익 창출의 통로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뮤지엄샵의 매출 증대는 박물관 재정 자립도로 이어져,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외부 기부금에 기대지 않고서도 질 높은 문화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끔 한다. 또한 유명 굿즈는 박물관의 인지도를 높인다는 차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김 팀장은 “박물관 굿즈에 대한 정보를 접한 고객이 전시에까지 관심을 갖고 관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해외 유명 박물관들의 경우 예술작품 굿즈로 수익사업을 벌인지 오래다. 최근에는 굿즈의 인기가 박물관 인지도 상승과 홍보로 이어지자, 작가와 큐레이터의 협업을 통해 박물관이 직접 굿즈를 제작하기도 한다. 미국의 박물관상점협회(MSA)에 따르면 미국 박물관들은 평균적으로 5%에서 15%가량의 매출을 기념품 관련 사업으로 올리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의 경우에도 2018년 6백만 달러(약 70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이는 미술관 전체 수익의 7%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범위한 장식미술, 공예품 콜렉션으로 이름이 높은 런던의 빅토리아앤알버트(V&A)는 2018-2019년 회계보고서에 따르면 기념품 관련 사업으로 1500만 파운드(약 221억 82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박물관 전체 매출의 14%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는 국내 박물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연희 국민대 박물관·미술관학과 교수는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문화시설이 대중화되면서 대중도 유물이나 미술 작품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겼다”며 “굿즈는 이런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아바타(avatar)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해외의 경우 굿즈들이 박물관의 브랜드가 돼 문화시설을 알리는데 기여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화시설들은 굿즈 제작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꺼린다”며 “한국에서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채용해 문화시설의 마케팅적인 측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