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윤 기자]
여자친구와 이별 후 생긴 우울감이 지속되면서 게임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는 사이 빚이 늘어나 우울감은 점점 심해졌다. 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극심한 스트레스로 2개월 전 자살을 시도하려고 옥상에 올라갔고, 전화를 받은 부모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해 다행히 목숨은 구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살 위험이 높은 상태라 병원에 입원했다.
#2 정민(가명)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베팅식 ‘사다리게임’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용돈 2만~3만 원을 베팅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점점 액수가 커지면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부모의 패물에도 손을 대다 걸렸다. 그해 여름방학 때 6주간 상담치료를 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다시 게임에 빠져 친구들에게 돈을 빌린 사실이 들통나자 집을 뛰쳐나갔다. 열흘가량 PC방 등을 전전하던 정민은 결국 절도죄로 경찰에 입건됐고, 아버지가 피해자와 합의해 사회봉사 40시간 명령을 받는 선에서 선처를 받았다.
하지만 정민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본인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또다시 가출해 찜질방에서 절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전과 2범으로 전락한 것이다. 절망에 빠진 부모는 그래도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정민이와 병원을 찾았다.
10월 26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열린 ‘2018 행위 중독 치유 해법 포럼’(포럼)에서 소개된 게임중독 사례들이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는 이들처럼 어려서부터 게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거나 범죄로 이어져 찾아온 10, 20대 젊은 환자가 적잖다고 한다.
“확률형 게임 아이템 사행성 조장”
10월 26일 ‘행위 중독 치유 해법 포럼’에서 축사를 한 자유한국당 박인숙 의원(왼쪽)과 종합 토론의 사회를 맡은 강지원 중독포럼 고문(변호사). [박해윤 기자]
이날 사례 발표에 나선 조근호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사업과장은 “최근 게임이나 도박중독자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추세”라면서 “도박성 게임중독은 다른 중독에 비해 훨씬 만성적이고 치료가 어렵다”고 말했다. 조 과장은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완치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완치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도박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포럼에선 이처럼 게임중독 문제의 심각성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이해국 가톨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조 발표에서 “온라인 게임은 아이들로 하여금 건강과 사회성 발달, 학업적 성취 등 미래의 만족과 거리를 두게 하고, 어른들의 경우 현실적 관계에서 정서적 교감이나 행복과 멀어지게 한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이 진단한 게임중독의 원인은 다양했다. 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사회적 불평등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정 교수는 “흔히 중독 문제는 개인의 잘못된 선택 혹은 개인적 질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나 사회적 박탈감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중독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세계약물(마약)보고서(World Drug Report)’ 데이터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불평등한 국가일수록 약물 사용이 많고, 미국에서도 불평등이 심한 주(state)일수록 약물중독과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다는 것. 또 불평등한 국가일수록 정신질환 유병률과 문제성 도박 유병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홍성관 한국IT직업전문학교 게임스쿨(게임심리학) 교수는 디지털 콘텐츠의 과도한 선정성과 사행성 문제를 지적했다. “게임업체, 특히 주요 대형업체가 게임을 통한 수익과 시장점유율을 높이려고 ‘유료 확률형 아이템’을 만들어 사행성을 조장하고, 등급제를 무시한 채 선정성과 폭력성을 강화해 게임중독을 유발하고 있다”는 게 홍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 ‘만 12세 이상’이 이용하는 게임인데도 성적인 대사와 신음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옷 벗기기 등 지나치게 선정적인 게임도 적잖은 상황이다. 그나마 게임은 나은 편이다. 등급제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는 홍보 광고물의 경우 성인용 동영상이나 다름없는 실정이다.
사행성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게임에 빠진 일부 청소년이 확률형 아이템을 얻으려고 1~2시간 만에 수천만 원을 탕진하는 사례도 있다는 것. 최근에는 인기 유튜버들이 만 17세 이상만 이용할 수 있는 사행성 게임에 대신 돈을 걸어주겠다며 초등학생까지 유혹하고 있다. 게임업계는 스스로 사행성이나 선정성 문제를 바로잡겠다며 ‘자율규제 인증마크’ 제도를 시행한다고 하지만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게임중독을 예방하고 치유하려면 정부 차원의 예방 및 관리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홍성관 교수는 “보호가 필요한 아동·청소년을 위한 실질적인 안전망 구축이 절실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콘텐츠에 안전장치를 필수적으로 설치하고, 부적절한 과금 요소와 선정적이고 사행성을 부추기는 콘텐츠에 대한 처벌 수위를 강화해야 하는 만큼 유관 부처 간 긴밀한 협력체제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WHO ‘게임중독’ 질병 분류, 대부분 “찬성”
10월 26일 ‘행위 중독 치유 해법 포럼’에서 중독 사례를 발표한 조근호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사업과장, 기조 발표를 한 이해국 가톨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주제 발표를 한 정슬기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와 홍성관 한국IT직업전문학교 게임스쿨 교수(왼쪽부터). [박해윤 기자, 홍중식 기자]
정슬기 교수는 “중독에 따른 건강 격차를 감소시키려는 정부의 의지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게임중독을 유발하는 친화적 환경이 불편한 환경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터넷 게임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특히 취약계층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광고 규제가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안을 발표했다. 내년 5월 총회에서 최종 결정할 예정인데, 개정안 통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날 종합 토론에 참석한 전문가는 대부분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WHO 개정안에 찬성했다.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상규 한림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내년 WHO 총회에서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정식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며 “행위 중독이 정식 진단이 포함된 장애라는 점이 좀 더 명확해져야 정부 차원의 예방이나 개입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홍정익 보건복지부 건강정책과장은 “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할 경우 그 결정의 권위라든지 전문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보건 입장에서 동의하고 당연히 그에 맞춰 대책을 수립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