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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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나누면 남자가 떠나갈까 두려워서…

롤리팝을 좋아한 여자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06-24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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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연우(37·가명), 그녀는 이팝나무 꽃을 연상시켰다. 단 하얗게 꽃만 피우고, 붉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미완의 이팝나무 말이다. 이지적인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찾아왔다. 다리를 꼬고 앉아 소개해준 사람의 이름을 댔다. 이혼서류를 접수하고 숙려기간에 내게 상담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유씨에게 부부관계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내가 대단한 구실을 한 것처럼 과장해서 말한 듯했다.

    “상담을 통해 무엇이 변하리라는 기대는 없습니다. 그래도 오게 된 이유는 지금 만나는 남자가 미칠 것 같다고 해서, 그리고 무료해서요.”

    한없이 건방지면서도 이 세상 얼굴이 아닌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미칠 것 같다는 분을 보내시지, 왜 본인이 오셨나요?”

    “그건 그가 미칠 것 같은 원인이 나니까, 내가 상담을 받으면 그 자신이 안 미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상담은 주로 나의 질문으로 이뤄졌다. 그녀는 팝아트 그림을 그렸다. 그녀에게 상담을 권한 남자는 그녀와 4개월쯤 사귄 뮤지컬 연출가였다. 유복한 집안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녀는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혼 의지는 희박했다. 자기 일을 좋아했지만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무심했으나 주변엔 남자들이 들끓는 듯했다. 정신적 유대 없는 성관계를 가진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했다. 지금 만나는 남자는 유씨를 많이 좋아했고, 단순한 연애 이상의 관계를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첫 상담 이후 상담이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유씨는 스스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무료해서 나를 찾아온 것뿐이었으니까. 유씨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였던 셈이다.

    독신주의자 아닌데 결혼 의지 희박

    상담이 거듭되는 동안 점점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는 듯한 립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을 종용한 그녀의 남자친구를 불렀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든 좋든 유씨와 나 두 사람이 담판을 지어야 했다.

    상담이 후반에 들어섰을 때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나는 고민 끝에 과거 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도 심리학자가 아닌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수련’을 받은 것은 순전히 언어 때문이었다. AIMS(인도 델리의 국립종합병원) 유학 시절 내 동기들은 모두 이 병원의 신경정신의학과 소속 심리학자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런데 심리학자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이 힌디어(영어와 함께 쓰는 인도의 최대 공용어)를 쓰는 바람에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신경정신의학과 학과장에게 찾아가 고충을 전하고 도움을 청했다. 수련을 못 받으면 졸업이 불가능할 판이었다. 학장은 자신의 환자들(나중에 알았는데 모두 고학력자들이었다)은 모두 영어를 쓰니 자신 밑에서 수련을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대학원 동기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학장 밑에서 수련을 했다. AIMS 역사상 의과생도 아니면서 신경정신과 학과장 밑에서 수련을 받은 유일한 심리학과생이 됐다.

    6개월간 매일 학과장실로 출근했는데, 그 방은 꽤 넓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 멀리 창가 쪽의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은 은발의 그가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버스보이(급사)는 커피 없이는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그를 위해 매일 오전, 오후 커피를 한 주전자씩 끓여 놨고, 학과장은 환자와 상담 중에도 자연스레 담배를 꺼내 물곤 했다(15년 전 인도였고, 학과장쯤 됐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환자가 돌아가면 그는 내게 담배를 권하고, 환자 증세와 치유 과정에 대해 아주 쉽게 설명해준 뒤 질문을 받았다. 그에게서 권위란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를 기억하면 커피 향과 담배연기가 넘실대던 방, 매의 눈과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은발의 자그마한 학과장과 그가 앉기엔 너무 큰 마호가니 책상이 떠오른다. 그는 길게 상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 안에 환자들은 적어도 두세 번 배를 잡고 웃었다. 그는 작은 체구였지만 흔들림 없고 생명력이 왕성한 나무 같았다. 환자들은 마치 지친 새처럼 날아와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격이었다.

    내가 전화했을 때 그는 스위스에 있었다. 그는 예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인 한 잔 하고 들어가게.”

    ‘사랑’ 나누면 남자가 떠나갈까 두려워서…
    “네?”

    “힘을 빼라는 얘길세. 자네는 내가 만난 가장 용감한 학생이었네. 심리학과 학생이 찾아오다니! 그리고 나에게 자네를 훈련하도록 맘먹게 만들지 않았나. 용기 있는 사람의 결점이 뭔지 아나. 무겁다는 거야. 욕심이 많지. 뭘 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게. 치유하겠단 욕심을 버리라고. 상담이란 생각을 아예 잊어. 그리고 상담받으러 온 사람과 즐기게. 새도 기뻐야 입이 터지고 노래가 나오는 걸세. 자네 내담자가 아무런 생각 없이 웃어야 하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웃기려고 하진 말고. 웃을 때 틈이 생기는 거야. 그 틈을 놓치지 말게.”

    그 후 유씨가 찾아오기로 한 날, 나는 와인 대신 맥주캔 하나를 따고 그녀를 맞았다. 그런데도 건방지고 시니컬한 표정의 그녀를 보자 약간 긴장됐다.

    “연우 씨는 남자를 믿지 않죠. 그래서 소모품처럼 자꾸 갈아치워요. 평소 연우 씨라면 상담 받으란 말에 코웃음을 쳤을 거예요. 그런데 왜 지금의 그 남자 말은 착한 아이처럼 듣는 거죠? 그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그래서 겁이 나는 겁니다. 지금 이 건방지고 시니컬한 모습은 다 자기방어예요. 아닌가요?”

    줄곧 바람피웠던 아버지 트라우마

    편하게 한다는 것이 그만 하고픈 말을 다 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오르며 숨을 몰아쉬는 게 보였다. 지도교수는 내담자를 사심 없이 웃게 만들라 했거늘, 난 구석으로 모는 꼴이었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열어두고 쫓으란 말이 있지만, 정 도망치고 싶으면 배트맨처럼 날겠지 하는 생각에 마지막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혹시 레즈비언이세요?”

    그녀의 눈이 무섭게 빛나더니 눈가에 눈물이 고여 반짝였다. 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서랍에서 롤리팝 막대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딸기향인데 빨면 기분 좋아져요. 제가 해봐서 알아요.”

    갑자기 그녀가 풉 소리를 내더니 배를 잡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난 어정쩡하게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 말의 이중적 의미(섹스 유머)를 당시엔 몰랐다.

    레즈비언이냐는 말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화가 나서 그녀에게 한 말이었고, 롤리팝은 그녀가 섹스에 자주 이용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녀는 평생 남자를 믿지 못했다. 줄곧 바람을 피운 아버지 탓이었다. 남자를 만나 육체관계를 맺으면 남자들이 떠날 것이란 불안감에 유씨가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 그것은 그녀의 남녀관계를 규정하는 일종의 패턴이 됐다. 그러다 정말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남자를 만나자 갈등과 불안으로 행동이 종잡을 수 없게 됐고, 남자친구는 그녀의 그런 행동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 된 것이다. 유씨는 마침내 자기감정을 인정하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진전시켜 보기로 했다.

    마지막 상담시간 미소 가득한 유씨를 떠나 보내고, 홀로 된 나는 ‘관계의 패턴을 깨고 나아가는 것’이 모든 남녀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의 패턴은 무엇이며, 과연 그 패턴이 깨어질까’란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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