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별 볼 일 없는 여자’에서 한 여성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늘 여자의 첫사랑이 되고 싶어 하죠. 그건 남자들의 꼴사나운 허영심일 뿐이에요. 우리 여자들은 좀 더 예민한 본능을 갖고 있거든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건 남자의 마지막 로맨스가 되는 것이랍니다.”
조지 버나드 쇼에게 첫사랑이란 “약간의 어리석음이 더해진 호기심덩어리”였으며, 벤저민 디즈레일리에겐 “종착역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이었다. 과연 당신에게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첫사랑은 천재 과학자에게도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첫사랑같이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을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뭐라고 말하든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영원 속에 봉인된 신화다. 대부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채색되고 끊임없이 각색되는 이야기다. 대개 어리고 젊을 때 찾아오는 열병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찬란했던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다. 버나드 쇼가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기 아깝다”고 말한 의미 그대로 젊음은 젊음을 감당할 수 없는 젊은이의 것이듯, 첫사랑은 항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시간에 찾아오는 열병이다. 그래서 오노레 드 발자크는 “첫사랑은 일종의 백신(예방접종)이다. 그것으로 하여 남자는 두 번째 사랑부터 불평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달콤 씁쓸’ 모두를 위한 동화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은 한 음악가를 통해 본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우화이자, 첫사랑을 앞두거나 겪은 모든 이를 위한 동화다. 달콤한 비극이자 씁쓸한 희극인, 그래서 ‘달콤 씁쓸’한 희비극인 첫사랑이 부리는 고약한 장난을 동화 같고 마법 같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선율의 향연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를 공동 연출한 마르잔 사트라피와 뱅상 파로노는 원래 만화와 일러스트 작가로 이란 혁명기 펑크록을 좋아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경쾌하게 그려낸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로 유명하다. 실사영화인 이번 작품에서도 그들의 빼어난 회화적 감각이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눈이 호강하고 귀가 행복해지는 영화다.
“‘옛날 옛날에 누군가가 살았는데…’라고 페르시아의 모든 옛이야기는 시작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1950년대 이란 테헤란 거리의 한 음악가를 소개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나세르 알리 칸(마티외 아말릭 분)이라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다. 그가 쓰던 바이올린은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쳐져 부서져버렸다. 이후 새 바이올린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어떤 것도 예전 악기만 못하다. 동생 소개로 모차르트가 쓰던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까지 손에 넣지만 그 소리 또한 천재 음악가의 귀를 사로잡을 수 없다. 이 괴팍한 천재는 옛 바이올린을 대신할 악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을 결심한다. 어떻게 죽을까. 기차 선로에 목을 걸치고 가로 눕기? 낭떠러지에서 투신하기? 아니면 권총 자살?
하지만 칸은 이 세 가지 자살법은 “너무 아플 것 같아” 통과. 수면제 먹고 비닐봉투를 뒤집어쓴 채 죽는 것이 가장 편하다지만 세계적인 음악가에겐 결코 폼 나지 않는 최후라 포기. 결국 칸은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 만에 죽어 8일째 되는 날 땅에 묻힌다.
평생 생계와 자녀양육을 도맡아온 아내의 독기어린 타박과 잊을 만하면 그의 바지춤을 잡고 놔주지 않는 아이들. 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음악세계에 빠진 괴팍한 천재 예술가. 사뭇 우스꽝스러운 그의 행동을 때론 고색창연한 고전영화처럼, 때론 마술 같은 판타지 영화처럼, 때론 원색적인 만화처럼 채색된 이란의 도시 안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칸이 죽음을 결심한 후 마지막 일주일간을 통해 첫사랑과 예술, 인생의 아이러니를 그려간다.
죽음을 결심하고 침대에 누운 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칸의 지난날이 환영처럼 흘러간다. 그는 부모 말 안 듣고 공부도 안 하며 매번 사고만 치는 소년이었으나 음악 재능만은 출중해 20대가 되면서 당대 최고 거장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스승의 말은 아직 젊은 그에게 어렵기만 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자네 음악은 쓰레기야. 삶은 숨결 같은 거네. 한숨 같은 거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그것을 낚아채야 해.”
삶이 짓는 매순간의 표정 담아내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테헤란의 어느 길모퉁이 악기점에서 이레인(골시프테 파라하니 분)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한눈에 빠져든다. 두 남녀는 불꽃같은 사랑을 태우며 결혼을 약속하지만 “무일푼 음악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레인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 그때부터 그의 한숨은 사랑의 고통이 되고,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희열이 된다. 음표 하나, 현줄 하나에도 고통과 희열의 숨결이 담긴 그의 연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지만, 평범한 여성을 만나 아이들을 낳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사랑을 잃으며 음악을 얻었으나, 그 순간부터 삶은 고통이 됐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사람은 어쩌면 남편의 연주에 깃든 다른 여인의 영혼을 평생 느끼며 살아야 했던 아내였는지도 모른다. 현실과 예술 사이, 지금의 가족과 지나간 첫사랑 사이에서 늘 팽팽하던 바이올린 줄은 결국 끊어지고, 부서진 악기는 천재 예술가의 목숨을 재촉했다. 샹송에서 탱고, 재즈, 클래식까지 바이올린 독주에서 협주, 관현악곡까지 아우르는 음악은 칸의 삶이 짓는 매순간의 표정을 기막히게 담아냈다. 예술에 생명을 불어넣고, 육신의 죽음을 가져온 첫사랑의 아이러니가 영상과 음악, 유머와 비극의 조화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는 시인 장석주의 시 제목은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다. 불가능한 것은 늘 꿈이 된다.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은 첫사랑에 관한, 그 불가능에 관한 매혹적인 꿈이다.
“남자는 늘 여자의 첫사랑이 되고 싶어 하죠. 그건 남자들의 꼴사나운 허영심일 뿐이에요. 우리 여자들은 좀 더 예민한 본능을 갖고 있거든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건 남자의 마지막 로맨스가 되는 것이랍니다.”
조지 버나드 쇼에게 첫사랑이란 “약간의 어리석음이 더해진 호기심덩어리”였으며, 벤저민 디즈레일리에겐 “종착역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이었다. 과연 당신에게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첫사랑은 천재 과학자에게도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첫사랑같이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을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뭐라고 말하든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영원 속에 봉인된 신화다. 대부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채색되고 끊임없이 각색되는 이야기다. 대개 어리고 젊을 때 찾아오는 열병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찬란했던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다. 버나드 쇼가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기 아깝다”고 말한 의미 그대로 젊음은 젊음을 감당할 수 없는 젊은이의 것이듯, 첫사랑은 항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시간에 찾아오는 열병이다. 그래서 오노레 드 발자크는 “첫사랑은 일종의 백신(예방접종)이다. 그것으로 하여 남자는 두 번째 사랑부터 불평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달콤 씁쓸’ 모두를 위한 동화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은 한 음악가를 통해 본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우화이자, 첫사랑을 앞두거나 겪은 모든 이를 위한 동화다. 달콤한 비극이자 씁쓸한 희극인, 그래서 ‘달콤 씁쓸’한 희비극인 첫사랑이 부리는 고약한 장난을 동화 같고 마법 같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선율의 향연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를 공동 연출한 마르잔 사트라피와 뱅상 파로노는 원래 만화와 일러스트 작가로 이란 혁명기 펑크록을 좋아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경쾌하게 그려낸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로 유명하다. 실사영화인 이번 작품에서도 그들의 빼어난 회화적 감각이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눈이 호강하고 귀가 행복해지는 영화다.
“‘옛날 옛날에 누군가가 살았는데…’라고 페르시아의 모든 옛이야기는 시작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1950년대 이란 테헤란 거리의 한 음악가를 소개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나세르 알리 칸(마티외 아말릭 분)이라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다. 그가 쓰던 바이올린은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쳐져 부서져버렸다. 이후 새 바이올린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어떤 것도 예전 악기만 못하다. 동생 소개로 모차르트가 쓰던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까지 손에 넣지만 그 소리 또한 천재 음악가의 귀를 사로잡을 수 없다. 이 괴팍한 천재는 옛 바이올린을 대신할 악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죽음을 결심한다. 어떻게 죽을까. 기차 선로에 목을 걸치고 가로 눕기? 낭떠러지에서 투신하기? 아니면 권총 자살?
하지만 칸은 이 세 가지 자살법은 “너무 아플 것 같아” 통과. 수면제 먹고 비닐봉투를 뒤집어쓴 채 죽는 것이 가장 편하다지만 세계적인 음악가에겐 결코 폼 나지 않는 최후라 포기. 결국 칸은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 만에 죽어 8일째 되는 날 땅에 묻힌다.
평생 생계와 자녀양육을 도맡아온 아내의 독기어린 타박과 잊을 만하면 그의 바지춤을 잡고 놔주지 않는 아이들. 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음악세계에 빠진 괴팍한 천재 예술가. 사뭇 우스꽝스러운 그의 행동을 때론 고색창연한 고전영화처럼, 때론 마술 같은 판타지 영화처럼, 때론 원색적인 만화처럼 채색된 이란의 도시 안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칸이 죽음을 결심한 후 마지막 일주일간을 통해 첫사랑과 예술, 인생의 아이러니를 그려간다.
죽음을 결심하고 침대에 누운 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칸의 지난날이 환영처럼 흘러간다. 그는 부모 말 안 듣고 공부도 안 하며 매번 사고만 치는 소년이었으나 음악 재능만은 출중해 20대가 되면서 당대 최고 거장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스승의 말은 아직 젊은 그에게 어렵기만 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자네 음악은 쓰레기야. 삶은 숨결 같은 거네. 한숨 같은 거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그것을 낚아채야 해.”
삶이 짓는 매순간의 표정 담아내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테헤란의 어느 길모퉁이 악기점에서 이레인(골시프테 파라하니 분)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한눈에 빠져든다. 두 남녀는 불꽃같은 사랑을 태우며 결혼을 약속하지만 “무일푼 음악가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레인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 그때부터 그의 한숨은 사랑의 고통이 되고,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희열이 된다. 음표 하나, 현줄 하나에도 고통과 희열의 숨결이 담긴 그의 연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지만, 평범한 여성을 만나 아이들을 낳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사랑을 잃으며 음악을 얻었으나, 그 순간부터 삶은 고통이 됐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사람은 어쩌면 남편의 연주에 깃든 다른 여인의 영혼을 평생 느끼며 살아야 했던 아내였는지도 모른다. 현실과 예술 사이, 지금의 가족과 지나간 첫사랑 사이에서 늘 팽팽하던 바이올린 줄은 결국 끊어지고, 부서진 악기는 천재 예술가의 목숨을 재촉했다. 샹송에서 탱고, 재즈, 클래식까지 바이올린 독주에서 협주, 관현악곡까지 아우르는 음악은 칸의 삶이 짓는 매순간의 표정을 기막히게 담아냈다. 예술에 생명을 불어넣고, 육신의 죽음을 가져온 첫사랑의 아이러니가 영상과 음악, 유머와 비극의 조화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는 시인 장석주의 시 제목은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다. 불가능한 것은 늘 꿈이 된다.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은 첫사랑에 관한, 그 불가능에 관한 매혹적인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