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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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디 @오메가

제4화 하얀 침대

  • 입력2013-06-24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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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북한 개성의 고려 성균관이었다. 한복이 참 잘 어울렸다. 가느다란 목선이 매력적이었다. 이름이 뭘까? 필승의 가슴은 뜀박질을 시작했다. 마당 저편에 하늘로 치솟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보였다.

    “은행나무… 멋지네요.”

    “형님 성균관이라 그렇습네다.”

    “형님 성균관요?”

    “예, 개성 성균관은 고려 성균관이고, 서울 성균관은 조선 성균관 아닙네까?”



    출입문 밖 기념품 파는 좌판이 보였다. 둘은 그곳으로 걸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요.” 필승을 바라보는 그녀의 양 볼에 홍조가 스쳐갔다. 마주친 눈빛이 반짝 빛났다. “기념품 하나 추천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네다.”

    둘은 소주 등 주류 판매 좌판을 지났다. 경옥고 등 식품 파는 좌판도 그냥 지났다. 책을 파는 좌판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책, 어떻습네까?”

    “책이요?” 필승은 그녀 옆으로 다가섰다. 체취가 코끝을 스쳤다. 어깨가 살짝 닿았다. 다시 가슴이 쿵쾅거렸다. ‘송악산의 전설’을 집어 드는 순간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필승은 책과 함께 펜을 내밀었다.

    “사인 부탁합니다.”

    그녀는 필승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글을 쓰는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반갑습네다. 설순.’

    한동안 순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필승은 열병을 알았다. 헛된 생각이라 치부할수록 더 빠져들었다. 개성공단 입주 회사에 취직한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영영 문이 닫힐까 두려웠다. 통일전망대라도 보고 싶었다. 필승도 함께 가자고 했다. 여옥은 조수석에 앉은 필승을 힐끔 쳐다보았다. 개성공단 문을 닫고 자동차에 산더미처럼 물건을 싣고 온 그날처럼 그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여옥은 그날 착잡한 마음에 퇴근을 미루고 있었다. 자정쯤이었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필승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나, 사실은… 이제 순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순이라니?”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요.”

    “뭐라고?” 여옥은 말문이 막혔다. “니들 관계 누구 아는 사람 있어?”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야?”

    “개성공단에서 다시 만났어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다시 만나게 됐다고?”

    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출근 날이었습니다. 근로자 틈에서 순의 얼굴만 보였어요. 발걸음이 순 앞에서 저절로 멈췄습니다. 저를 알아본 순은 재봉틀에 손가락이 끼여 다칠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어요. 의무실로 데려갔는데 순은 이렇게 말했어요.‘반갑습네다. 정말 반갑습네다. 꼭 다시 만날 줄 알았시요’.”

    여옥의 자동차는 잠실대교로 향하고 있었다. 자동차에 꽂아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경찰섭니다. 잠깐 나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로는 곤란하고….”

    여옥은 필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찰서로 오라는데… 혹시?”

    “…어떻게 하죠?” 필승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여옥은 올림픽대로 출구를 나와 경찰서로 향했다. 여옥은 주차를 하고 경찰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관은 여옥을 보자마자 일어섰다.

    “함께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군부대에서 오라는군요. 저도 무슨 일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여옥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신호음이 채 한 번도 울리기 전에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홉 마디 @오메가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필승은 여옥이 경찰서로 들어간 후 주차장 한켠에 있는 흡연실로 향했다. 안에서는 서너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여자 입에서도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빨간 입술이었는데….’ 모든 사물이 순으로 이어졌다. 남북관계가 숨 가쁘게 돌아가던 날 필승은 둘만의 은밀한 장소로 순을 불렀다.

    “무섭습네다.”

    “안심해. 괜찮아.”

    “그렇지 않습네다. 몰라서 하는 소리야요.” 순은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널 데려갈게.”

    “농담 아닙네다.”

    “나도 농담 아냐.” 필승은 순의 양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필승 씨를 만나러 갈 겁네다.” 순은 필승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깍지를 끼듯 필승의 허리를 감았다. 순의 입김이 필승의 귓불을 스쳤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필승을 빤히 쳐다보았다. 필승의 허리를 감은 채였다. 둘은 입맞춤을 했다. 순은 갑자기 필승의 허리를 풀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필승은 순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필승의 휴대전화가 심하게 떨렸다. 여옥이었다. 필승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누나!”

    “….”

    “알겠습니다.”

    여옥이 탄 자동차는 강화대교 직전에서 우회전을 했다. 잠시 후 초소가 나왔다. 자동차를 세우고 초소로 갔다. 신분증을 내밀자 위병 한 명이 부대 안으로 둘을 안내했다. 위병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 출입구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는 군인과 민간인이 뒤섞여 있었다. 경찰관이 소개하자 군복 차림의 의무관이 여옥에게 악수를 청했다.

    “설순이라는 근로자를 아십니까?”

    “순이라면…?” 필승과 순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네, 봉재공장에서 일하는….”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의무관은 작은 방으로 여옥을 안내했다. 방은 얼음장 같았다. 한쪽 구석에 하얀 천이 덮인 침대가 있었다. 의무관은 여옥을 바라보았다.

    “걷어보시죠.”

    여옥은 떨리는 손으로 하얀 천을 걷었다. 순이 누워 있었다.

    “순아, 네가 왜….” 말이 채 끝나기 전 여옥은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문 틈으로 강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 군의관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충격을 받으실 만하지요. 강물을 따라 남하하다 변을 당한 모양입니다. 필승이란 사람이 누군가요?”

    “직원입니다.”

    “연인 사이였나 봅니다.” 군의관은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고인이 필승이란 사람에게 보내는 유품입니다.”

    여옥은 비닐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에는 ‘사랑하는 필승 씨에게’라고 적힌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경찰관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운전을 했다. 여옥은 얼른 돌아가 쉬고 싶었다. 처음에는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 완강했다. 죽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유품이라도 전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설득했다. 먼 훗날이라는 조건을 달고, 보안 각서를 쓴 후 받아올 수 있었다. 때가 되면 필승에게 전해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여옥은 그 편지를 펼쳐보았다.

    강을 건너기로 했습네다. 발각되면 강물에 몸을 던질 겁네다. 필승 씨가 없으면 삶보다도 죽음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네다. 혼령이라도 당신 곁에 머물 수 있으니까요. 무사히 강을 건너 필승 씨를 보고 싶지만 운명이 허락해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사랑합네다. 설순.

    여옥은 사무실을 빙 둘러본다. 분주하다. 필승이 가장 바쁘다. 일로 시름을 잊으려는 듯….

    ‘못난 놈…. 개성공단 문이 열리면 필승이를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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