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 우리가 알고 있던 훈남 이미지를 버려야 하나….”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온다. 정조(1752~1800년)에 대한 얘기다. 소설, 드라마, 영화를 통해 성군(聖君)으로, 인자한 왕으로, 개혁 군주로 그려진 조선 22대 왕(재위 1776~1800년) 정조.
이런 탄식이 나오는 이유는 새롭게 발굴돼 2월9일 공개된 정조의 어찰첩 때문이다. 발굴된 편지는 299통. 모두 자기 아래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 심환지(1730~1802년)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그 가운데 이날 공개된 것만 봐도 정조를 가리키던 수식어는 크게 바뀌어야 할 판이다. ‘막후정치의 대가’ ‘다혈질의 소유자’ ‘막말도 서슴지 않는 군주’ 등으로 말이다. 어찰첩 덕분에 바야흐로 정조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는 것.
정조가 다혈질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곳곳에 있다. 호론(湖論)의 대표 한원진을 반대하는 젊은 학자 김매순의 행동에 흥분해 쓴 편지에서 정조는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五更·새벽 3~5시)이 지났다”고 토로했다. 신하들을 꾸짖는 편지에선 ‘호래자식(胡種子)’ ‘젖비린내’ ‘주둥아리’ 같은 단어를 써가며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한자로 써내려가던 편지에서 뜬금없이 한글로 ‘뒤박’(뒤죽박죽)이라 쓴 것을 두고 성격이 급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적절한 한자가 생각나지 않자 급한 마음에 일단 한글로 썼다는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개에 물린 꿩 신세’ ‘꽁무니 빼다’ ‘누울 자리 보다’ 같은 속담, 비속어를 자주 사용한 대목에선 권위와 체면을 버린 소탈한 모습이 엿보인다.
따뜻한 면모도 드러난다. 정조는 잠시 곁을 떠나 있던 심환지에게 “헤어진 뒤로 어느덧 달이 세 번 바뀌고 50일이 지났는데, 그리운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다.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정조는 함께 보낸 약재들의 이름을 별지에 일일이 적어 편지에 동봉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조가 ‘막후정치’에 능했음을 보여주는 편지들이다. “충청도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리를 안배할 것”을 지시하는 등 인사(人事)에 개입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상주(上奏·왕에게 말씀을 아뢰는 일)하도록 한 뒤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 상주문의 글귀를 직접 써서 보내기도 했다.
정조가 ‘일벌레’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만한 대목도 있다. “일을 보느라 바빠서 잠깐의 틈도 내기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으니, 피로하고 노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된다.”
이래저래 정조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하는 연구가 불가피해졌다. 그렇다면 세종과 효종은 실제로 어떤 군주였을까. 다른 왕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사료 역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탄식이 나오는 이유는 새롭게 발굴돼 2월9일 공개된 정조의 어찰첩 때문이다. 발굴된 편지는 299통. 모두 자기 아래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 심환지(1730~1802년)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그 가운데 이날 공개된 것만 봐도 정조를 가리키던 수식어는 크게 바뀌어야 할 판이다. ‘막후정치의 대가’ ‘다혈질의 소유자’ ‘막말도 서슴지 않는 군주’ 등으로 말이다. 어찰첩 덕분에 바야흐로 정조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는 것.
정조가 다혈질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곳곳에 있다. 호론(湖論)의 대표 한원진을 반대하는 젊은 학자 김매순의 행동에 흥분해 쓴 편지에서 정조는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五更·새벽 3~5시)이 지났다”고 토로했다. 신하들을 꾸짖는 편지에선 ‘호래자식(胡種子)’ ‘젖비린내’ ‘주둥아리’ 같은 단어를 써가며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한자로 써내려가던 편지에서 뜬금없이 한글로 ‘뒤박’(뒤죽박죽)이라 쓴 것을 두고 성격이 급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적절한 한자가 생각나지 않자 급한 마음에 일단 한글로 썼다는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개에 물린 꿩 신세’ ‘꽁무니 빼다’ ‘누울 자리 보다’ 같은 속담, 비속어를 자주 사용한 대목에선 권위와 체면을 버린 소탈한 모습이 엿보인다.
따뜻한 면모도 드러난다. 정조는 잠시 곁을 떠나 있던 심환지에게 “헤어진 뒤로 어느덧 달이 세 번 바뀌고 50일이 지났는데, 그리운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다.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정조는 함께 보낸 약재들의 이름을 별지에 일일이 적어 편지에 동봉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조가 ‘막후정치’에 능했음을 보여주는 편지들이다. “충청도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리를 안배할 것”을 지시하는 등 인사(人事)에 개입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상주(上奏·왕에게 말씀을 아뢰는 일)하도록 한 뒤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 상주문의 글귀를 직접 써서 보내기도 했다.
정조가 ‘일벌레’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만한 대목도 있다. “일을 보느라 바빠서 잠깐의 틈도 내기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으니, 피로하고 노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된다.”
이래저래 정조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하는 연구가 불가피해졌다. 그렇다면 세종과 효종은 실제로 어떤 군주였을까. 다른 왕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사료 역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