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1/02/21/201102210500004_1.jpg)
한나라당 이학재(47) 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 비서실장을 맡은 지 반년이 됐다. 지난해 8·8 개각 당시 비서실장이던 유정복 의원이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바통을 넘겨받았으니, 벌써 6개월이 흘렀다. 그도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행은 차치하더라도, 박 전 대표와의 만남 자리 주선 부탁부터 각종 강연·인사말 요청까지 그를 바쁘게 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정중히 거절 말씀을 드려도 미안하더라고요. 그만큼 박 전 대표의 지지자가 많다고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를 구합니다. 제가 잘못하면 박 전 대표가 왜곡돼 비칠 수 있어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공식·비공식 자리를 위한 각종 자료는 박 전 대표가 직접 챙기는 편이라 비서실장으로서 일하기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친이(친이명박)계 의원들과의 회동과 개헌 문제, 대선 캠프 조직 등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고 보니, 1시간 반 인터뷰 도중 박 전 대표와 친이계 의원 관련 질문에는 ‘엔터 키’가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검지가 아래위로 한참을 움직여도 답변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된다’는 일종의 자기최면은 그가 유력 대권주자의 비서실장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박 전 대표가 지난 대선 후보 경선에서의 패배를 반면교사 삼아 경선 캠프를 일찍 출범시킬 것’이라는 정치권의 예측에 대해 ‘두 번의 패배는 없다’라고 단언했다.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과 달리 조직 구성 등 실질적인 역할을 할 캠프 설치에 대해선 “현재로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제가요?” 신인에서 전국적 인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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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원은 민선 3기 최연소 구청장(인천 서구청장)에 당선돼 인천지역에서는 이름이 알려졌지만, 비서실장이 되기 전까지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정치 신인’이었다. 비서실장에 임명될 무렵 정치권과 기자들 사이에는 “이학재가 어떤 사람이냐”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지난해 유 장관 입각이 결정되고 며칠 후 박 전 대표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유 장관이 하신 일을 맡아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평소 스타일대로 제 의견을 먼저 물으셨죠. 그때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요?’라고 말했을 정도니….”
박 전 대표의 스케줄을 챙기고 청와대와 친이계의 창구 구실을 하는 비서실장을 정치 신인에게 요청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가 박 전 대표와 인연을 맺은 대선 후보 경선으로 흘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인천지역 당원협의회 위원장 12명 중 8명은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인천지역 구청장 10명 중 8명은 박 전 대표를 밀었다. 당시 서구청장이었던 이 의원은 인천지역 군수구청장협의회 총무를 맡아 구청장‘8대 2’구도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를 포함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기초단체장들은 박 전 대표가 만든 상향식 공천제도 때문에 당선된 경우가 많았어요. 당원협의회 위원장과 구청장은 대의원 투표 등 경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경선 캠프에서 서로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경쟁이 치열했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행정가여서 객관적으로 후보자를 판단했죠. 그때 판단 잘한 거 같아요(웃음).”
2년 뒤 구청장 자리를 내놓고 18대 국회의원(인천 서구강화갑을)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을 때 ‘그 판단’은 부메랑이 돼 날아들었다. 친이계 핵심 의원이 인천에 와서 ‘(친박계인) 이학재는 안 된다’며 공천을 반대했다. 그는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무소속이든, 한나라당 소속이든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가 나오자 당 공천심사위원회는 결국 그에게 공천을 줬다. 그는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53.77%(4만5346표)의 득표율로 국회에 입성했다.
“막상 ‘무소속 출마 배수진’을 쳤지만 공천을 받았기 때문에 당선되지 않았나 싶어요. 시골 지역에선 여전히 당을 보고 찍는 분이 많거든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도움을 주신 거 같아요.”
‘웬 아버지?’하고 기자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의 입에서 사부곡(思父曲)이 흘러나왔다.
![“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1/02/21/201102210500004_4.jpg)
1995년 이립(而立)의 나이에 지방선거에 출마해 구의원이 됐고, 이후 두 번의 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내기까지 그의 정치적 스승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항상 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도 거침없이 해내셨어요. 속이 불편한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베이킹) 소다를 한 스푼 입에 털어 넣고 일하셨죠. 힘들 때면 ‘아버지도 그렇게 멋있게 사셨는데 이 정도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최면을 걸었죠.”
2001년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그는 인천 부평고와 서울대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인천 서구청장에 출마해 43.9%(3만7216표)를 득표하면서 전국 최연소(37세) 구청장이 됐다.
“구청장이 돼 보니 제가 없어도 시스템으로 돌아가더라고요. 그래서 오전 7시쯤 집을 나와 2시간 정도 구(區)의 곳곳을 걸어서 돌아다녔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마을에 어려운 게 없나’하고 일거리를 찾아 나선 거죠. 1년 구 예산이 2000억 원가량인데 경상비 빼면 100억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신규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자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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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사람이 하잖아요.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거죠. 당연히 서비스를 받는 주민들의 생활만족도도 커지게 되죠.”
그래서일까. 그는 4년 만에 19.2%포인트나 득표율을 끌어올렸다. 2006년 구청장 연임에 도전해 63.1%(7만1346표)를 획득, 인천지역 단체장 중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그를 ‘전국적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박 전 대표였다면, 정치인으로 키운 건 8할이 아버지였던 셈이다. 이 의원의 아버지는 이 의원이 중학교 2학년 때인 1978년 고혈압과 중풍으로 쓰러져 21년간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이 정도면 천운이죠. 37세에 구청장이 돼 10년간 큰 실패를 하지 않고 왔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도우신 거죠.”
어느새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