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릉 정자각의 잡상, 용마루 취두(鷲頭) 아래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의 잡상이 보인다. 이 잡상은 궁굴과 종묘에도 있으며 각종 마귀를 쫓기 위한 수호적 상징물로 해석된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로 많이 알려진 인물)의 장남이다. 헌종의 왕실 이름은 환(奐)이고 자는 문응(文應)이다. 헌종은 1827년 7월 18일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헌종은 즉위 후 줄곧 할머니 순조비 순원왕후(안동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죽어 4세에 왕세손이 됐다가 할아버지 순조가 승하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됐기 때문이다. 헌종은 조선의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은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호도 묘에서 수릉이라 추숭(追崇)했다. 그러나 정작 왕은 너무 어려 능을 참배하지 못하다가 즉위 5년 후에야 비로소 배알할 수 있었다.
국제정치 요동 나라 안은 혼란
헌종은 재위 14년 7개월 대부분을 할머니의 수렴청정과 세도가의 원상정치에 휘둘려 자신의 뜻은 별로 펼치지 못했다. 내부의 권력싸움으로 국제정치에 눈 돌릴 겨를도 없었던 그는 신흥 지식층이 가져오는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천주교를 탄압했다. 이런 판국에 전라, 경상 등에 이양선이 들어와 통상협상을 하자 하니 준비가 안 된 세도정국은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은 혁명을 통해 근대국가로 가고 있었으며, 자본주의 노동자들의 결성과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해 공산주의 이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유선통신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혼란을 겪으며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서양문물의 출몰에 대비해 수비를 강화하면서도 열강들과의 교류를 준비하는 등 국제정치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의 헌종은 원상들에 둘러싸인 할머니만 쳐다보는 신세였다.
헌종은 학문을 좋아해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을 편찬하는 치적을 쌓기도 했다. 효현왕후 김씨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 꽃다운 나이 16세에 급서해 충분한 자리 물색도 없이 3일 만에 지금의 자리에 능침 터를 잡았다. 이곳은 240년 전 선조의 목릉이 건원릉 동측 언덕으로 옮겨간 자리였다. 헌종은 다음해 영돈녕부사 홍재룡의 딸(효정왕후) 홍씨를 왕비로 삼았다. 효현왕후가 승하한 뒤 17세의 헌종은 현직 왕으로서 서둘러 왕비 간택에 들어갔던 것이다.
경릉의 무인석 이마가리개의 마크는 왕권 강화를 위해 두었던 총위영(摠衛營)의 태극마크로 추정된다. 정조 때는 만(卍)자, 순조 때는 삼원별 등의 형태다.
‘한사경’에 따르면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 일가는 중전의 친가인 남양 홍씨가 세도를 부릴까 우려해 중전 홍씨의 월경 날짜를 알아낸 다음 그날만 헌종을 중전의 방에 들어가게 했다. 헌종과 효정왕후의 사이를 멀게 하려는 일종의 계책이었던 셈. 어떻든 헌종은 2명의 왕비와 2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후손 없이 23세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때 안동 김씨 집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왕위 서열에도 어긋나는 당숙뻘의 강화도령(철종)을 모셔오는 국정혼란을 일으켰다.
경릉은 원래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던 자리로 십전대길(十全大吉)의 터로 알려져왔다.
정치에서 밀려나 있다 23세에 승하
1849년 봄부터 병으로 고생하던 헌종이 6월 6일 오시(午時)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승하하니 춘추 23세, 재위 15년째였다. 헌종은 젊은 나이임에도 사치는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고 금기시하며 백성을 위해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했다. 좋은 옷과 음식을 경계하고 겨울에는 무명을, 여름에는 모시를 입었다. 하지만 그는 치마폭에 싸인 힘없는 왕이었다. 정치에서 밀려난 그는 한문 서예체 중 하나인 예서를 특히 좋아하고 잘 썼다. 그래서인지 그가 사랑했던 경빈 김씨의 낙선재엔 예서 글씨가 많으며 현판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가 직접 썼고, 정문의 장락문(長樂門) 현판도 흥선대원군이 남긴 글씨다.
경릉은 왕과 정비, 계비의 봉분이 각기 다른 난간석을 두른 독특한 형식이다. 이런 형태는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선대 왕조에서나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 베트남에서 볼 수 없는 양식이다.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 이와 같이 다양한 형식의 봉분 제도를 갖고 있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봉분들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자연관을 잘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능원 형식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왕과 왕비의 능원을 별도로 조성하고 능의 이름도 달리한 단릉(單陵)으로 대표적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이다. 둘째는 한 언덕의 평평한 곳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달리해 우상좌하(우왕좌비·남자는 우측에 여자는 좌측)로 배치한 쌍릉(雙陵)인데, 대표적 능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을 들 수 있다. 셋째는 하나의 정자각 뒤에 한 줄기의 용맥에서 나누어진 다른 능선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설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대표적인 능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이다. 넷째는 왕과 왕비의 능침을 같은 용맥의 능선 위와 아래에 배치한 왕상비하 형태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이는 여주에 있는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을 들 수 있다.
(왼쪽) 우왕좌비(右王左妃),남우좌녀(男右女左)의 원칙을 따라 조성된 경릉은 조선시대 유일의 삼연릉이다. 능침 배치는 앞에서부터 계비 효정왕후→ 정비 효현왕후→ 헌종 순이다. (오른쪽) 경릉의 문무석인은 선으로 표현이 잘돼 있으며 입술을 가볍게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이외에도 하나의 곡장에 왕과 왕비 각각의 방을 달리 만들되, 봉분은 하나로 만들고 혼유석을 두 개 놓은 합장릉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이 최초이며 대표적이다. 세종은 살아생전에 부인인 소헌왕후의 능침을 만들면서 능역의 간소화를 위해 자신도 합장할 것을 명했다. 조선 최고 성군의 면모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이곳 헌종의 경릉에서와 같이 세 분을 한 언덕에 봉분을 달리해 모신 삼연릉이 있으며, 왕과 정비, 계비를 한 봉분에 모신 동봉삼실릉도 있다.
이처럼 조선 왕릉은 지형의 모습에 따라 다양한 능침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조선 왕릉은 한국인 고유의 자연관과 전통사상 등이 각 능침 형식과 조각, 건조물, 공간 구성 등에 잘 반영돼 있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이들을 연속유산(Serial nomination)으로 평가, 등재하고 인류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40기를 모두 둘러보고 느껴야 518년 동안 이어진 조선 왕릉의 장구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경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세 능침을 이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을 따로 놓고 문석인, 무석인과 기타의 석물은 단릉과 쌍릉처럼 동일하게 조영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가는 선으로 조각해 전체적으로는 다소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눈꺼풀과 눈동자 등은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입체감을 더했다. 특히 문무석인의 입술을 모두 얇게 조각한 부분과 마치 골난 듯 묘사한 표정이 재미를 더한다. 무인석의 갑옷 묘사가 상당히 장식적이고 투구 앞의 마크가 태극 모양을 한 것이 눈길을 끈다. 정조 때 조영한 융릉의 무석인 투구 앞면 이마가리개에는 원형 속에 만(卍)자가 있으며, 순조의 인릉 것에는 3개의 원형 볼이, 수릉 것에는 십자형 세곡 수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정조 때 장용영(壯勇營), 순조 때 총리영(總理營), 헌종 때 총위영(摠衛營), 이후 철종 때 총융청(摠戎廳) 같은 왕의 근위대 마크가 아닌가 추정해본다.
경릉 능원의 좌향은 정서에서 정동향을 바라보는 유좌묘향(酉坐卯向)이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헌종의 능침 좌향과 왕후들의 능침 좌향이 다르게 돼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는 풍수적 논의를 하다 빚어진 착오로 짐작하나 필자는 능원의 전체적 좌향은 유좌묘향이지만 각 회격실의 방향은 다른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조선 왕릉의 내부 공간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긴 미스터리로, 앞으로 풀어야 할 부분이다.
사실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때 외국의 몇몇 학자는 능원이 매장 문화재임에도 능침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없는 점을 들어 조선 왕릉의 세계유산 등재의 진정성을 의심한 바 있다.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던 국내 학자들도 이를 염려했었다. 다행히 왕릉 내부의 모습과 매장 문화재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각종 의궤 등이 있어 진정성 논쟁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6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는 제례문화의 문화유산적 가치 그리고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된 조상숭배 사상과 이로부터 비롯된 후손들의 묘지 손상에 대한 거부감 등을 설명하자 위원들도 내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조선 왕릉 매장 문화재에 대한 궁금증이 날로 증가하는 것도 사실이다. 차제에 능침 내부와 부장품 그리고 능원 조영기술 등을 알 수 있도록 모형을 만드는 것도 학문적 궁금증을 해소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