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지긋한 어느 교수가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윤리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사직서를 품에 안고 총장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그 어른 왈, 어쩌면 그리도 미련스럽게 일을 벌이느냐, (물론 농담이겠지만) 나처럼 안 들키고 하면 안 되느냐. 그러면서 사직서를 찢어 버렸다. 총장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고, 그 교수는 벼랑길 같은 상황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물론 수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잘못을 했으면 교수 아니라 교수 할아버지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그리고 ‘조폭’(組暴)도 아닌 사람이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잘 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목격된 사람 관계에 대해서만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어지간하다면, 주변 동료가 예기치 못한 실족(失足)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될까. 하이에나가 득시글대면 인간은 살지 못하는 법이다.
컨페드컵 축구대회를 지켜보면서 오래 전 한 대학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불현듯 생각났다. 차범근 감독 때문이다. 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참패당하고, 그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몇 마디 말을 잘못한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쫓기다시피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런 차감독이 언제부턴가 다시 돌아와 TV 해설도 하고 신문에 축구 칼럼도 쓴다.
필자가 다니던 대학은 차범근 선수 한 사람 때문에 4년 내내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며느리가 미우면 버선 뒤꿈치도 보기 싫다더니, 그가 ‘엉뚱하게’ 남의 대학에서 규수를 찾았을 때, 우리는 비웃었다.
자기 학교에 얼마나 여자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넘어다보나. 그러자 옆에 있는 친구가 받아서 가로되, ‘야, 창피하다. 우리 대학에 얼마나 남자가 없으면 글쎄 저기까지 가서 신랑을 찾나.’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 모두 웃고 말았다. 연-고전(延高戰)의 승패야 어찌 되었든, 차범근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영웅이었다. 그가 독일로 진출, 분데스리가에서 마음껏 기량을 발휘했을 때 온 국민은 열광했다. 아무리 한국 제1의 스타라 하더라도 선진 축구의 벽은 결코 쉽사리 넘볼 수가 없었다. 차범근은 밤낮 없이 쇠고기만 먹었다고 한다. 속에서는 신물이 나고, 이가 흔들릴 정도로 미련스럽게 먹어댔다. 그래야 서양사람과 맞부딪쳐도 힘에서 밀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사람 실수 감싸고 사람 귀하게 여겨야
차범근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무나 스타가 되는 게 아니다. 남모르는 고통과 괴로움과 외로움을 이겨내야만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타의 화려한 면만 바라보기 좋아할 뿐, 그 뒤편의 그림자에는 관심이 없다. 영웅에게 쏟아지는 찬사에 무임승차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 할 뿐, 그가 흘린 눈물과 각고(刻苦)의 땀방울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 스타가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음미할 줄 모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를 반복하다 보면 사람이 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초라해진다. ‘영웅 대망론(待望論)’ 속에 움트는 사회병리학적 현상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네덜란드에 무참하게 유린당한 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차범근 감독 혼자 희생양이 될 것을 강요했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그를 매도해 버렸다. 그러면서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3년 뒤, 한국팀은 또다시 5 대 0의 수모를 당했다. 그것도 안방에서.
사람 키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없으면 스타로 클 수가 없다. 그런 눈물을 흘려 보지도 못했고, 흘릴 의지도 없으니 함부로 욕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범근 감독에게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뜻을 펴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이 땅의 모든 예비 스타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크는 것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 대접만 제대로 해도 우리 사회가 10배는 밝아질 것이다.
물론 수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잘못을 했으면 교수 아니라 교수 할아버지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그리고 ‘조폭’(組暴)도 아닌 사람이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잘 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목격된 사람 관계에 대해서만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어지간하다면, 주변 동료가 예기치 못한 실족(失足)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될까. 하이에나가 득시글대면 인간은 살지 못하는 법이다.
컨페드컵 축구대회를 지켜보면서 오래 전 한 대학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불현듯 생각났다. 차범근 감독 때문이다. 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참패당하고, 그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몇 마디 말을 잘못한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쫓기다시피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런 차감독이 언제부턴가 다시 돌아와 TV 해설도 하고 신문에 축구 칼럼도 쓴다.
필자가 다니던 대학은 차범근 선수 한 사람 때문에 4년 내내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며느리가 미우면 버선 뒤꿈치도 보기 싫다더니, 그가 ‘엉뚱하게’ 남의 대학에서 규수를 찾았을 때, 우리는 비웃었다.
자기 학교에 얼마나 여자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넘어다보나. 그러자 옆에 있는 친구가 받아서 가로되, ‘야, 창피하다. 우리 대학에 얼마나 남자가 없으면 글쎄 저기까지 가서 신랑을 찾나.’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 모두 웃고 말았다. 연-고전(延高戰)의 승패야 어찌 되었든, 차범근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영웅이었다. 그가 독일로 진출, 분데스리가에서 마음껏 기량을 발휘했을 때 온 국민은 열광했다. 아무리 한국 제1의 스타라 하더라도 선진 축구의 벽은 결코 쉽사리 넘볼 수가 없었다. 차범근은 밤낮 없이 쇠고기만 먹었다고 한다. 속에서는 신물이 나고, 이가 흔들릴 정도로 미련스럽게 먹어댔다. 그래야 서양사람과 맞부딪쳐도 힘에서 밀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사람 실수 감싸고 사람 귀하게 여겨야
차범근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무나 스타가 되는 게 아니다. 남모르는 고통과 괴로움과 외로움을 이겨내야만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타의 화려한 면만 바라보기 좋아할 뿐, 그 뒤편의 그림자에는 관심이 없다. 영웅에게 쏟아지는 찬사에 무임승차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 할 뿐, 그가 흘린 눈물과 각고(刻苦)의 땀방울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 스타가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음미할 줄 모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를 반복하다 보면 사람이 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초라해진다. ‘영웅 대망론(待望論)’ 속에 움트는 사회병리학적 현상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네덜란드에 무참하게 유린당한 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차범근 감독 혼자 희생양이 될 것을 강요했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그를 매도해 버렸다. 그러면서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3년 뒤, 한국팀은 또다시 5 대 0의 수모를 당했다. 그것도 안방에서.
사람 키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없으면 스타로 클 수가 없다. 그런 눈물을 흘려 보지도 못했고, 흘릴 의지도 없으니 함부로 욕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범근 감독에게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뜻을 펴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이 땅의 모든 예비 스타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크는 것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 대접만 제대로 해도 우리 사회가 10배는 밝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