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8일 아침 8시. 인천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을 탄 지 14시간 만에 답사단을 태운 배는 중국 산둥(山東)성의 끝자락 웨이하이(威海) 항구에 다다랐다. 황해로 깊이 돌출한 산둥 반도는 만주를 제외하고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중국 땅. 이 지역이 중국과 한반도를 바닷길로 오가는 사람의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1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고루 선발한 67명의 초·중·고 역사 및 사회 담당 교사로 이루어진 답사단은 배에서 내린 뒤 곧바로 룽청(榮成)에 자리잡은 항구 석도진으로 달려갔다. 반도의 끝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9세기경 신라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석도진의 뒤편 츠샨(赤山)의 안자락에는 중국 내 신라인 사회의 수장이던 장보고가 820년경 창건한 절 법화원(法華院)이 앉아 있다.
“법화원은 당시 신라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공간입니다. 마치 재미동포 사회에서 교회가 중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백 명의 신도와 승려가 모두 신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요.” 답사단 인솔 교수인 부산외국어대 역사학과 권덕영 교수의 말이다. 844년 당나라 조정의 불교탄압정책에 의해 폐쇄된 법화원을 1988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룽청 시 당국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당시 사람은 왜 신라를 떠나왔을까. 권교수는 크게 세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우선은 흉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기근을 피해 당나라에서 자활의 길을 찾은 사람이 한 무리다. 반복되는 신라 왕실의 권력투쟁의 와중에 망명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던 사람 역시 당나라로 향했다.
8세기 말 완도 근처 남해안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보고는 천민 출신이었다. ‘장’이라는 성 역시 당나라에 건너와 중국인 사이에 가장 흔하던 성을 따라 스스로 지어 붙인 것. 뛰어난 리더십과 무예실력이라는 자질에도 골품제의 벽을 넘을 수 없던 장보고는 812년 당나라로 건너가 산둥성의 주력부대인 무령군의 군중소장이라는 관직에 오른다. 당대 중국 최고의 문인이던 두목(杜牧)은 자신의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장보고의 활동을 기록하며 “어찌 동이(東夷 : 중국에서 한반도를 일컫던 말)에 인물이 없다 하겠는가”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지방 반란을 진압하는 등 무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한 그가 관직을 접고 신라로 귀국한 것이 828년. 황해를 무대로 준동한 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위해서였다.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해상무역을 장악한 장보고가 조공중심이던 무역 패턴을 자유무역으로 바꾸면서 ‘해상왕’이라 불릴 만큼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미국 하버드대의 에드윈 라이샤워 명예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청해진 세력을 상업제국(commercial empire)으로, 장보고를 무역왕(merchant prince)으로 지칭했다. 동북아 3국을 네트워크화하며 무역·조선·금융 등의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의 경영자로 성장한 그는 결국 신라 정권의 막후 실력자 자리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천민 출신이라는 한계로 인해 권력다툼에 밀려 841년 끝내 암살된다.

이튿날 답사단이 찾은 옌타이(煙臺)는 9세기 산둥성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옌타이의 주요 항구인 등주의 포구에는 7세기 중반부터 신라 상인들의 도시형 촌락 신라방이 존재했으며 신라관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김덕수 교수는 신라관이 오늘날의 대사관과 무역대표부의 기능을 겸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천 년을 훨씬 넘긴 후에야 이곳을 찾은 답사단에게는 이들의 정확한 위치나 자취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수성(水城)만이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을 재촉할 따름이다.
장보고 시대 이전부터 등주항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생활 터전이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 출신 장수 이정기가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일종의 자치구를 세워 중앙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거점이 바로 이 도시였던 것. 781년 이정기가 병사하고 난 뒤 남은 세력을 정벌한 것이 장보고가 속해 있던 무령군 부대였다. 이후 일대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정기 세력은 장보고가 산둥 지역에 신라인 사회를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권덕영 교수는 설명했다.
장보고가 살해된 이후 간신히 세력을 유지하던 청해진과 산둥성의 신라인 사회는 서서히 붕괴되었다. 츠샨의 법화원이 강제로 폐쇄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 장보고라는 인적 구심점과 법화원이라는 공간적 구심점을 동시에 잃어버린 신라인은 당나라 사회로 동화되어 가며 민족적 정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귀족 출신 일부는 신라로 돌아갔지만 천민 출신이던 대부분의 이민은 쓸쓸히 중국인 사이로 흩어졌으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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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야말로 장보고의 후예들 아닐까요. 황해를 앞마당처럼 누비던 장보고 선단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까요.” 답사단에 참여한 인천 인하대부속고 이정록 교사의 말이다. 중국을 오가는 많은 한국인은 산둥성 곳곳에 제2, 제3의 신라방을 건설하며 분투하고 있었다. 다시 1200년이라는 먼 세월을 지나 산둥성 한국인의 발자취를 따라올지 모를 미래의 답사단은 이들이 한국을 떠나온 이유를 어떻게 해석할까. 장보고 선단의 항로를 그대로 따라 한반도를 향해 파도를 헤치는 여객선 갑판에서 바라본 바다는 끝없이 광활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