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냉전을 마감한 가운데 시작된 90년대는 잔혹한 전쟁범죄로 얼룩진 10년으로 평가된다. 아프리카의 르완다, 시에라 리온이 피로 물들었고, 발칸반도의 보스니아와 코소보가 그랬다. 지구촌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저질러진 반인류적 참상들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기는커녕, 대부분 자신의 비호세력들에 둘러싸여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빌랴나 플라브시치(70·여)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르프스카) 부통령이 1월9일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 자진 출두한 것. 보스니아 내전(1991~95년) 당시 세르비아계 3인 대통령위원회 멤버로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에 이어 2인자였던 그녀는 당시 행한 범죄적 역할 때문에 수배를 받아왔다. 지금까지 체포된 발칸 전범 30여명 대부분이 송사리급이었던 데 비해 그녀는 가장 고위직에 있던 인물이다.
대어급 전범 자진 출두로 관심 증폭
플라브시치의 자진 출두를 계기로 “전쟁범죄 주범들을 반드시 헤이그법정에 세워 단죄해야 한다”는 국제적 관심이 새삼 높아졌다. 1999년 코소보전쟁 당시 알바니아계에 대한 인종청소 혐의로 기소된 전 독재자 밀로셰비치,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우두머리 라도반 카라지치와 군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 그 밖에 여러 명의 고위급 범죄자들은 아직 체포되지 않은 상태다. 미 클린턴 행정부는 밀로셰비치와 카라지치, 그리고 믈라디치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면 500만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을 걸어놓은 상태다. 문제는 짧은 시일 안에 이들이 잡히거나, 플라브시치처럼 제발로 헤이그법정에 들어설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90년대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 땅에 가장 많은 피를 뿌린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90년대 초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연방 잔류를 바라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보스니아 내전은 4년 동안 계속됐다. 그 결과 인구 400만의 소국인 보스니아에서 25만명이 죽고 80만의 난민이 생겼다. 코소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200만)의 자치권 투쟁에서 비롯된 코소보전쟁도 1998~99년에 1만명의 희생자와 85만명의 난민을 낳았다.
보스니아, 코소보에서의 발칸전쟁은 인류사에 기록될 잔혹함이란 측면에서 아프리카 시에라 리온 내전과 악명을 나란히한다. 91년부터 벌어진 시에라 리온 내전에서 혁명연합전선(RUF) 반군들이 비전투원인 시민들의 손목을 마구 잘라 악명을 얻었다면, 보스니아와 코소보는 체계적인 강간과 테러, 그리고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악명을 얻었다. 농경사회인 아프리카에서 손목을 잘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일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필자는 취재차 이 세 곳을 찾아갔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시에라 리온 내전보다 더 잔혹한 최악의 전쟁범죄가 발칸반도에서 행해졌다. 시에라 리온에서도 강간범죄들이 일어났지만, 다른 종족에 대한 인종청소와 추방을 노린 체계적인 강간은 아니었다.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의 참상을 말할 때 그곳 회교도들 사이에 ‘인간 도살자’로 불리던 아르칸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본명이 ‘젤리코 라드나토비치’인 아르칸은 극단적인 세르비아민족주의자로,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에서 ‘호랑이’라는 이름의 민병대를 조직해 비세르비아계에 대한 무차별 살육, 강간, 강도행위를 저질렀다.
필자가 지난 99년 6월 나토군을 따라 코소보로 들어갔을 때, 자코바 시 외곽의 한 마을은 아르칸의 호랑이 민병대에 깡그리 약탈당한 상태였다. 그들이 머물렀던 침실 벽에는 아르칸이란 낙서가 있었다. 일찍이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전쟁범죄로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비밀리에 기소된 바 있던 아르칸은 코소보전쟁이 끝난 다음해(2000년) 초 벨그라드 인터 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프로급 암살자의 총격을 받고 그의 경호원과 함께 죽었다. 아르칸은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약탈한 자금을 바탕으로 세르비아통합당(SSJ)을 만들었다. 당수의 죽음에도 불구, 세르비아통합당은 지난해 11월 세르비아 총선에서 14석의 의석을 확보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많은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정서 한 구석에는 극단적 세르비아민족주의의 독소가 남아 있음을 짐작케 하는 선거결과다.
문제는 이번에 자수한 빌랴나 플라브시치 등 당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이 아르칸의 잔혹행위를 막기는커녕 부추겼다는 점이다. 1992년 봄 아르칸이 많은 보스니아회교도를 죽이거나 추방하면서 보스니아의 비엘랴나를 점령했을 때, 라도반 카라지치에 이어 세르비아계 2인자였던 플라브시치는 아르칸을 애국자라 칭찬하면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에 대한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 쪽의 기소장은 아르칸의 범죄행위를 “묵과하고 공개적으로 축하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플라브시치는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저지른 잔학행위에 대해 “전쟁범죄가 아닌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강변을 늘어놓았다. 그런 까닭일까. 생물학교수 출신의 그녀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에 빗대어 ‘발칸의 철의 여인’으로 일컬어졌다.
그녀는 보스니아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지난 94년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퍼부은 적도 있다. 헤이그 법정에 선 플라브시치는 일반적으로 인종청소라 일컬어지는 집단학살(genocide), 집단학살 음모, 추방 등 그녀에게 따라붙은 아홉 가지 전쟁범죄를 모두 부인했다.
지난해 10월 보스니아에 갔을 때 필자는 수도 사라예보 곳곳이 여전히 내전의 상처를 안고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84년 동계올림픽을 치른 도시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옛 의사당 건물을 비롯한 주요 공공건물 외벽엔 포탄과 총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 언덕에서 라도반 카라지치의 세르비아세력이 마구잡이 포격을 해댄 탓이다. 사라예보를 벗어나 지방으로 가도 전흔은 마찬가지다. 곳곳에 지붕이 무너져 내린 흉한 모습의 건물들이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은 인구지도를 바꿨다. 많은 회교도들이 학살당한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비롯,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에서 밀려난 난민 상당수는 내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났건만 고향에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서유럽국가들이 50억달러어치를 지원했으나 보스니아는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업률 40%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토록 보스니아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내전의 주범 라도반 카라지치는 아직껏 붙잡히지 않은 상태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르프스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으로만 알려진 카라지치를 체포하려고 보스니아 주둔 나토평화유지군(SFOR)이 애를 쓰고 있지만 소득은 없다. 지역 내 세르비아인들이 그를 빼돌리고 감싸주는 탓이다. 지난해 10월 스르프스카공화국에 갔을 때 만난 그곳 젊은이들은 세르비아 특유의 세 손가락 사인을 해보이면서 “카라지치는 우리의 영웅”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런 정서는 지난해 11·11 총선에서 그대로 반영돼, 카라지치가 90년대 초 창당한 세르비아민주당(SDS)이 온건 세르비아사회민주당(SNSD)을 누르고 다수석을 차지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카라지치와 플라브시치는 적대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95년 말 데이튼 평화협정으로 보스니아 내전이 끝나자, 플라브시치는 스르프스카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카라지치에 대한 국제여론이 좋지 않자 그는 권좌에서 물러나는 대신 배후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테면 플라브시치가 카라지치의 ‘정치적 도구’가 된 셈이다.
플라브시치는 보스니아 회교 난민들의 귀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체포 요구도 무시했다. 그럼에도 미 클린턴행정부는 보스니아 내전 이후 화해와 평화를 위해 그녀를 지원해왔다.
1997년 플라브시치는 카라지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부패혐의로 몰아세웠고, 정치적으로 헤어졌다. 그녀를 친서방 인물로 점찍은 클린턴행정부는 98년 선거에서 강경파인 카라지치 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1억달러에 이르는 지원금을 그녀의 정당인 세르비아인민당(SNS)에 대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클린턴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카라지치가 내세운 극단적 세르비아민족주의자 니콜라 포플라센의 세르비아민주당(SDS)이 승리한 것이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유권자들은 플라브시치가 친서방적이라 자신들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 표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선거 패배 후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던 플라브시치는 이번에 헤이그법정에 서게됨으로써 새삼 전세계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됐다.
플라브시치의 자수 배경은 무엇일까. 당사자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한때 클린턴행정부가 그녀를 밀어주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녀가 서방에 협력하는 대가로 사면을 받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카라지치와 밀로셰비치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새롭고 구체적인 정보를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헤이그 재판소 쪽은 이런 사전조율설을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플라브시치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저질러진 잔혹행위들의 사실상 주범인 카라지치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을 비공개 정보들을 풀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소보전쟁과 관련, 1999년 전범으로 기소된 밀로셰비치 신병처리를 놓고 유고의 코스튜니차 새 정권에 부담을 안겨줄 전망이다. 이런 두 가지 노림수를 고려한 미국 쪽 입김으로 플라브시치가 자수한 것으로 보인다.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대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대주는 등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그는 1999년 코소보전쟁 당시의 인종청소 혐의로 기소됐을 뿐 보스니아 내전에서 그가 한 역할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플라브시치 심리과정에서 밀로셰비치의 범죄적 역할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또한 내전 당시 카라지치의 오른팔이었다가 지난해 4월 체포돼 현재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구금중인 몸칠로 크라이스닉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밀로셰비치 신병처리는 유고정권으로선 ‘뜨거운 감자’다. 보이스라브 코슈투니차 유고연방대통령은 신병처리에 반대하는 입장인 반면, 조란 진지치 총리는 찬성하는 태도다. 몸칠로 그루바치 법무장관은 “밀로셰비치가 플라브시치처럼 스스로 헤이그법정에 자수해야 한다”는 어중간한 태도다. 말은 무성하지만, 벨그라드정권이 직접 나서서 밀로셰비치를 전범재판소에 세울 뜻은 없어 보인다. 공연한 정치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악수를 두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현상금을 노린 조직적 납치기도 악몽에 시달릴 법한 밀로셰비치는 그러나 겉으론 태연한 모습이다. 그는 지난 연말 한 TV와의 이례적인 인터뷰에서 “내 양심은 깨끗하며 잠도 잘 잔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극단적인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 둘러싸인 이들 수배자를 과연 누가 붙잡아 헤이그 법정에 세울 것인가. 발칸반도에 주둔중인 나토 주축 평화유지군이 6만명에 이르지만, 그들을 붙잡기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최근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빌랴나 플라브시치(70·여)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르프스카) 부통령이 1월9일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 자진 출두한 것. 보스니아 내전(1991~95년) 당시 세르비아계 3인 대통령위원회 멤버로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에 이어 2인자였던 그녀는 당시 행한 범죄적 역할 때문에 수배를 받아왔다. 지금까지 체포된 발칸 전범 30여명 대부분이 송사리급이었던 데 비해 그녀는 가장 고위직에 있던 인물이다.
대어급 전범 자진 출두로 관심 증폭
플라브시치의 자진 출두를 계기로 “전쟁범죄 주범들을 반드시 헤이그법정에 세워 단죄해야 한다”는 국제적 관심이 새삼 높아졌다. 1999년 코소보전쟁 당시 알바니아계에 대한 인종청소 혐의로 기소된 전 독재자 밀로셰비치,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우두머리 라도반 카라지치와 군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 그 밖에 여러 명의 고위급 범죄자들은 아직 체포되지 않은 상태다. 미 클린턴 행정부는 밀로셰비치와 카라지치, 그리고 믈라디치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면 500만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을 걸어놓은 상태다. 문제는 짧은 시일 안에 이들이 잡히거나, 플라브시치처럼 제발로 헤이그법정에 들어설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90년대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 땅에 가장 많은 피를 뿌린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90년대 초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연방 잔류를 바라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보스니아 내전은 4년 동안 계속됐다. 그 결과 인구 400만의 소국인 보스니아에서 25만명이 죽고 80만의 난민이 생겼다. 코소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200만)의 자치권 투쟁에서 비롯된 코소보전쟁도 1998~99년에 1만명의 희생자와 85만명의 난민을 낳았다.
보스니아, 코소보에서의 발칸전쟁은 인류사에 기록될 잔혹함이란 측면에서 아프리카 시에라 리온 내전과 악명을 나란히한다. 91년부터 벌어진 시에라 리온 내전에서 혁명연합전선(RUF) 반군들이 비전투원인 시민들의 손목을 마구 잘라 악명을 얻었다면, 보스니아와 코소보는 체계적인 강간과 테러, 그리고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악명을 얻었다. 농경사회인 아프리카에서 손목을 잘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일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필자는 취재차 이 세 곳을 찾아갔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시에라 리온 내전보다 더 잔혹한 최악의 전쟁범죄가 발칸반도에서 행해졌다. 시에라 리온에서도 강간범죄들이 일어났지만, 다른 종족에 대한 인종청소와 추방을 노린 체계적인 강간은 아니었다.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의 참상을 말할 때 그곳 회교도들 사이에 ‘인간 도살자’로 불리던 아르칸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본명이 ‘젤리코 라드나토비치’인 아르칸은 극단적인 세르비아민족주의자로,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전쟁에서 ‘호랑이’라는 이름의 민병대를 조직해 비세르비아계에 대한 무차별 살육, 강간, 강도행위를 저질렀다.
필자가 지난 99년 6월 나토군을 따라 코소보로 들어갔을 때, 자코바 시 외곽의 한 마을은 아르칸의 호랑이 민병대에 깡그리 약탈당한 상태였다. 그들이 머물렀던 침실 벽에는 아르칸이란 낙서가 있었다. 일찍이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전쟁범죄로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비밀리에 기소된 바 있던 아르칸은 코소보전쟁이 끝난 다음해(2000년) 초 벨그라드 인터 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프로급 암살자의 총격을 받고 그의 경호원과 함께 죽었다. 아르칸은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약탈한 자금을 바탕으로 세르비아통합당(SSJ)을 만들었다. 당수의 죽음에도 불구, 세르비아통합당은 지난해 11월 세르비아 총선에서 14석의 의석을 확보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많은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정서 한 구석에는 극단적 세르비아민족주의의 독소가 남아 있음을 짐작케 하는 선거결과다.
문제는 이번에 자수한 빌랴나 플라브시치 등 당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이 아르칸의 잔혹행위를 막기는커녕 부추겼다는 점이다. 1992년 봄 아르칸이 많은 보스니아회교도를 죽이거나 추방하면서 보스니아의 비엘랴나를 점령했을 때, 라도반 카라지치에 이어 세르비아계 2인자였던 플라브시치는 아르칸을 애국자라 칭찬하면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에 대한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 쪽의 기소장은 아르칸의 범죄행위를 “묵과하고 공개적으로 축하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플라브시치는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저지른 잔학행위에 대해 “전쟁범죄가 아닌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강변을 늘어놓았다. 그런 까닭일까. 생물학교수 출신의 그녀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에 빗대어 ‘발칸의 철의 여인’으로 일컬어졌다.
그녀는 보스니아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지난 94년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퍼부은 적도 있다. 헤이그 법정에 선 플라브시치는 일반적으로 인종청소라 일컬어지는 집단학살(genocide), 집단학살 음모, 추방 등 그녀에게 따라붙은 아홉 가지 전쟁범죄를 모두 부인했다.
지난해 10월 보스니아에 갔을 때 필자는 수도 사라예보 곳곳이 여전히 내전의 상처를 안고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84년 동계올림픽을 치른 도시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옛 의사당 건물을 비롯한 주요 공공건물 외벽엔 포탄과 총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 언덕에서 라도반 카라지치의 세르비아세력이 마구잡이 포격을 해댄 탓이다. 사라예보를 벗어나 지방으로 가도 전흔은 마찬가지다. 곳곳에 지붕이 무너져 내린 흉한 모습의 건물들이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은 인구지도를 바꿨다. 많은 회교도들이 학살당한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비롯,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에서 밀려난 난민 상당수는 내전이 끝난 지 5년이 지났건만 고향에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서유럽국가들이 50억달러어치를 지원했으나 보스니아는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업률 40%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토록 보스니아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내전의 주범 라도반 카라지치는 아직껏 붙잡히지 않은 상태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르프스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으로만 알려진 카라지치를 체포하려고 보스니아 주둔 나토평화유지군(SFOR)이 애를 쓰고 있지만 소득은 없다. 지역 내 세르비아인들이 그를 빼돌리고 감싸주는 탓이다. 지난해 10월 스르프스카공화국에 갔을 때 만난 그곳 젊은이들은 세르비아 특유의 세 손가락 사인을 해보이면서 “카라지치는 우리의 영웅”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런 정서는 지난해 11·11 총선에서 그대로 반영돼, 카라지치가 90년대 초 창당한 세르비아민주당(SDS)이 온건 세르비아사회민주당(SNSD)을 누르고 다수석을 차지했다.
90년대 후반부터 카라지치와 플라브시치는 적대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95년 말 데이튼 평화협정으로 보스니아 내전이 끝나자, 플라브시치는 스르프스카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카라지치에 대한 국제여론이 좋지 않자 그는 권좌에서 물러나는 대신 배후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테면 플라브시치가 카라지치의 ‘정치적 도구’가 된 셈이다.
플라브시치는 보스니아 회교 난민들의 귀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체포 요구도 무시했다. 그럼에도 미 클린턴행정부는 보스니아 내전 이후 화해와 평화를 위해 그녀를 지원해왔다.
1997년 플라브시치는 카라지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부패혐의로 몰아세웠고, 정치적으로 헤어졌다. 그녀를 친서방 인물로 점찍은 클린턴행정부는 98년 선거에서 강경파인 카라지치 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1억달러에 이르는 지원금을 그녀의 정당인 세르비아인민당(SNS)에 대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클린턴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카라지치가 내세운 극단적 세르비아민족주의자 니콜라 포플라센의 세르비아민주당(SDS)이 승리한 것이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유권자들은 플라브시치가 친서방적이라 자신들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 표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선거 패배 후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던 플라브시치는 이번에 헤이그법정에 서게됨으로써 새삼 전세계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됐다.
플라브시치의 자수 배경은 무엇일까. 당사자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한때 클린턴행정부가 그녀를 밀어주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녀가 서방에 협력하는 대가로 사면을 받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카라지치와 밀로셰비치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새롭고 구체적인 정보를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헤이그 재판소 쪽은 이런 사전조율설을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플라브시치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저질러진 잔혹행위들의 사실상 주범인 카라지치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을 비공개 정보들을 풀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소보전쟁과 관련, 1999년 전범으로 기소된 밀로셰비치 신병처리를 놓고 유고의 코스튜니차 새 정권에 부담을 안겨줄 전망이다. 이런 두 가지 노림수를 고려한 미국 쪽 입김으로 플라브시치가 자수한 것으로 보인다.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대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대주는 등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그는 1999년 코소보전쟁 당시의 인종청소 혐의로 기소됐을 뿐 보스니아 내전에서 그가 한 역할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플라브시치 심리과정에서 밀로셰비치의 범죄적 역할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또한 내전 당시 카라지치의 오른팔이었다가 지난해 4월 체포돼 현재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구금중인 몸칠로 크라이스닉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밀로셰비치 신병처리는 유고정권으로선 ‘뜨거운 감자’다. 보이스라브 코슈투니차 유고연방대통령은 신병처리에 반대하는 입장인 반면, 조란 진지치 총리는 찬성하는 태도다. 몸칠로 그루바치 법무장관은 “밀로셰비치가 플라브시치처럼 스스로 헤이그법정에 자수해야 한다”는 어중간한 태도다. 말은 무성하지만, 벨그라드정권이 직접 나서서 밀로셰비치를 전범재판소에 세울 뜻은 없어 보인다. 공연한 정치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악수를 두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현상금을 노린 조직적 납치기도 악몽에 시달릴 법한 밀로셰비치는 그러나 겉으론 태연한 모습이다. 그는 지난 연말 한 TV와의 이례적인 인터뷰에서 “내 양심은 깨끗하며 잠도 잘 잔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극단적인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 둘러싸인 이들 수배자를 과연 누가 붙잡아 헤이그 법정에 세울 것인가. 발칸반도에 주둔중인 나토 주축 평화유지군이 6만명에 이르지만, 그들을 붙잡기란 간단치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