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6

..

EU 첫 대통령 헤르만 반 롬푸이 덩치 큰 유럽 이끌 인물 논란

“관용의 조정자” vs “타협의 사생아”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9-12-18 13: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EU 첫 대통령  헤르만 반 롬푸이 덩치 큰 유럽 이끌 인물 논란

    11월1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특별 정상회의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새 지도부. 헤르만 반 롬푸이 EU 상임의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및 오른쪽 큰 사진)과 캐서린 애슈턴(앞줄 가운데) 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지난 11월19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 본부에 27개 회원국 정상과 유럽 정치 수뇌부들이 모두 모였다. 유럽의 ‘미니 헌법’으로 불리는 리스본조약(EU의 정치 통합의 법적 토대가 된 조약)이 12월부터 발효됨에 따라, 5억 인구의 EU를 대표할 초대 상임의장과 외교안보 고위대표(이하 외교대표)를 뽑기 위해서다. 지금까지는 6개월에 한 번씩 회원국들이 차례를 정해 EU 의장국을 맡았기에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구 공산권 회원국 중 일부는 의장국으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었다.

    ‘숨 쉴 때만 입 여는 정치인’

    내년 1월부터 활동할 상임의장의 임기는 2년 6개월이고, 1회 연임이 가능하다. 상임의장은 매년 4차례 이상 열리는 EU 정상회의를 주재하고 대외적으로 EU를 대표한다. 미국 대통령보다 많은 30만∼35만 유로의 연봉을 받는 데다, 수십 명의 참모와 경호원이 수행하기 때문에 ‘EU 대통령’으로 불린다(행정부에 해당하는 EU 집행위원회는 집행위원장이 지휘하고, 각료이사회도 아직 예전처럼 6개월 주기로 의장이 바뀌기 때문에 정상회의와 각료회의 간에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

    상임의장의 이런 위상을 고려해볼 때,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상임의장감으로 거론됐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독일은 “중량급 정치인이 유럽 전체를 대표해 강한 힘을 행사할 경우 각국의 주권이 침해될 수 있다”며 경계했다.

    11월19일 각국의 총의(總意)는 예상외로 쉽게 모아졌다. 헤르만 반 롬푸이(Herman van Rompuy) 벨기에 총리가 상임의장, 캐서린 애슈턴 영국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외교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올해 하반기 EU 순번의장을 맡은 프레데릭 레인펠트 스웨덴 총리는 “27개국 정상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EU 첫 대통령  헤르만 반 롬푸이 덩치 큰 유럽 이끌 인물 논란
    사실 반 롬푸이(한국에서는 ‘롬푸이’로 표기하지만, 전치사 van은 언제나 성(姓)과 붙여 사용되므로 ‘반 롬푸이’로 표기하는 게 옳다)는 벨기에 정계에서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정치인이었다. 지난해 12월 이브 르테름 당시 총리가 포르티스은행 매각 재판 과정에서 사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스캔들로 사퇴하자, 벨기에 국왕이 후임 총리로 지명한 인물이 당시 하원의장이던 반 롬푸이였다.

    당시 벨기에 정가에서는 대체로 그의 능력을 반신반의했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그에 대한 평가는 놀랍도록 변했다. 벨기에를 두 동강 낼 뻔했던 네덜란드어권-프랑스어권 지역갈등이 잠잠해졌고, 최악의 경제위기도 비교적 잘 넘겼기 때문이다. “숨 쉴 때만 입을 연다”고 할 만큼 조용한 성품인 그가 지도자로서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귀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듣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각기 이해관계가 다른 27개 EU 회원국 간의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관용의 리더십’을 지닌 그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영어에 능통하고, 예수회 계열 대학을 나온 가톨릭 신자이며, 중도우파 정치인으로서 현재 유럽 정계 주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같은 날 EU 외교대표로 선출된 캐서린 애슈턴은 여성, 좌파, 그리고 영국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 해석된다. 정상회의 상임의장 후보로 유력하던 토니 블레어가 독일과 프랑스의 반대로 낙마하자 영국은 외교대표 자리를 요구했고, 이에 다른 회원국들이 묵시적으로 동의하면서 데이비드 밀리반드 영국 외교장관을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정작 밀리반드가 이를 고사하면서 인선 과정에 혼선이 있었고, 여성계에서 ‘성별 안배’를 촉구하면서 애슈턴이 급부상했다. 결국 좌파가 그를 공식 추천하면서 교통정리가 완결됐다.

    EU 첫 대통령  헤르만 반 롬푸이 덩치 큰 유럽 이끌 인물 논란
    애슈턴도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피터 만델슨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영국 고든 브라운 내각에 합류하면서 그의 후임을 맡았다. 일부 회원국의 반발에 맞서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한국-EU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 뛰어난 업무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맡게 될 외교대표는 종전의 외교정책 고위대표 및 대외관계 집행위원을 통합한 자리로, 27개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를 주재하며 EU의 외교정책을 총괄하게 된다. 기존의 외교정책 대표는 집행위 결정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역할에 그쳤지만, 새 외교대표에겐 실질적 권한이 있다. EU 외교부에 해당하는 대외관계청을 신설, 독립된 예산과 인력으로 외교정책을 수행할 예정이다. 대외관계청은 대규모 조직이 될 것으로 전망되기에 “2년 반 임기의 상임의장보다 5년 임기의 외교대표가 더 큰 권한을 가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찾아진 반 롬푸이-애슈턴 조합은 우파(기민당)와 좌파(노동당), 소국(벨기에)과 강대국(영국)의 균형과 함께 남녀 성별의 안배도 고려한, 매우 ‘유럽스러운’ 결과물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균형과 타협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국제무대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유럽 전체를 대표할 ‘얼굴’이 되고 말았다.

    ‘유럽스러운’ 결과물이 곧 유럽의 한계

    세계무대에서 EU를 대표할 최고 정치인을 선출하는 기준이 개인의 능력보다는 각국의 정치적 계산과 타협이었다는 사실, 또 무명에 가까운 두 인사를 유럽의 얼굴로 세웠다는 사실에서 바로 현재 유럽의 한계가 드러난다. 유럽은 왜 정치적 통합을 하려 했는가. 미국 같은 초대형 경제권과 맞서기 위함이다. 또 중국, 인도 등 신흥 대국이 국제무대에서 급부상하는 가운데 유럽의 발언권이 약화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렇지만 이처럼 무명의 지도자를 내세운 까닭에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럽정책센터(EPC)의 애널리스트 샤다 이슬람은 “유럽 지도자들은 정치적 거물보다 논쟁의 여지가 적은 ‘합의 구축자’들을 택했다”며 “이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주도하겠다는 의도가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좌파 정치인 올리비에 페랑은 “이번 인선을 통해 정치통합의 가속화라는 EU의 야심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의 큰 나라 지도자들은 새로운 권력자의 출현으로 자신들의 위상이 약해지는 것을 면하려 했다”고 비판했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 대통령과 중국 국가주석은 앞으로도 (EU 상임의장보다는) 베를린, 런던, 파리를 먼저 접촉해야 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한목소리를 크게 내는 유럽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는 얘기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