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으로 영화에 출연한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이미숙, 윤여정, 김옥빈(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만일 톱클래스의 여배우들이 모인다면 어떨까. 그들은 자신만의 모임이나 친목이 있을까.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은 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대답부터 하자면, 정상급 여배우 셋이 모이면 침묵이 흐른단다. 그 누구도 ‘먼저’ 누군가에게 고개 숙이지 않기 때문에.
영화 ‘여배우들’ 역시 웬만해서는 같이 모이지도, 함께 사진촬영할 수도 없는 한국의 여배우들을 세대별로 모아 화보사진을 찍는다는 설정으로 출발한다. 담당 에디터는 영화 시작부터 이 프로젝트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한국의 톱클래스 배우들이야. 이들을 모으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라고 말이다.
‘여배우들’은 여배우들의 무대 밖 삶, 프레임 밖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재치 있게 풀어나간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여배우’라는 조건 아래 각 세대의 대표적 아이콘이 소환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다양한 조합에서 가장 먼저 촬영장에 도착한 사람이 60대 여배우, 그러니까 최고 연장자라는 사실이다. 늦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왔지만 그는 너무 일찍 도착해 촬영현장의 걸림돌이 된다. 어쩔 줄 몰라하며 근처에 사는 여배우에게 전화를 거는 그는 처량 맞기도 하고 인간적이기도 하다.
윤여정이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여배우들’이 어떤 성격의 영화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TV나 스크린에서 카리스마를 불태우던 윤여정과 달리, 너무 일찍 도착한 나이 든 여배우 윤여정은 여유 있으면서도 불안해 보인다. 여유는 이제 여배우로서의 도도함보다 인간적 깊이가 주요 매력이 된 연륜에서 비롯하고, 불안함은 더 이상 주연이 아닌 조연에 익숙해진 경험에서 나온다.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각기 다른 세대와 캐릭터를 지닌 여배우들은 각자의 고민을 내뱉는다. 50대 여배우가 늙어감에 대해 말할 때, 30대 배우들은 ‘아직…’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이혼에 관해 얘기할 때는 공통의 상처를 환기한다. 한류 스타 최지우는 ‘톱 오브 더 톱’을 내세우는데, 그 모습이 일면 수긍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불편하다. 막내 김옥빈은 20대답게 무한한 가능성을 불투명한 미래로 오해한다. 그렇게 그들은 각기 다른 고통과 고민, 비밀스러운 상처를 말한다.
영화 ‘여배우들’은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닮아 있다. 여배우들은 영화 속에서 ‘화보 촬영을 하는 여배우’라는 역할을 하지만, 자기 이름을 걸고 자신의 삶을 직접 보여준다. 이혼에 대해 말하는 고현정의 모습에는 실제 고현정과 영화 속 캐릭터의 고현정 모습이 겹쳐 있다. 한류 스타 최지우의 모습은 과연 어디까지가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궁금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우리가 상상해온 이미지와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이미지 가운데서 정답을 맞히듯 자신의 짐작과 예상을 점검한다. 누구는 기대만큼 성격이 좋아 보이고 다른 누군가는 생각보다 털털하기도 하다.
영화가 ‘영화’ 같아지는 순간은 ‘여배우들’의 마지막 부분이다. 늦어진 촬영 일정과 말싸움 때문에 냉랭해졌던 공간은 샴페인과 눈으로 따뜻해진다. 아예 촬영 따위는 잊고, 여배우들은 음식과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그렇게 겨울밤은 깊어가고, 여배우들은 친구가 된다. 과연 그들이 진짜 친구가 된 것일까. 사실 그건 모를 일이다. 친구가 된 연기를 한 것인지, 진짜 친구가 된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이 알쏭달쏭함은 영화 ‘여배우들’의 재미와 매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쇼를 표방한 픽션, 진심과 연기 사이를 오가는 궁금증 그 한가운데에 바로 ‘여배우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