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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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경 뛰어넘은 농민 돕기

‘개도국 농산물 제값 주고 사기 운동’ 확산 … 인증품목 834개 ‘1년 새 5배로’

  • 케임브리지=안병억 통신원 anpye@hanmail.net

    입력2005-03-31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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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국경 뛰어넘은 농민 돕기

    페어 트레이드 홈페이지.

    얼마 전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한 슈퍼마켓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농업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그리 크지 않은 가게인데도 ‘개도국 농산물 제값 주고 사기’ 코너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코너에는 바나나와 초콜릿, 커피, 차 등 네 가지 품목이 ‘개도국 농산물 제값 주고 사기 상표(Fair Trade Mark)’가 부착돼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또한 이 품목들의 원산지 표시와 함께 “이 상품을 구입할 경우 원산지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코너를 지켜본 지 20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10명이 넘는 손님들이 상품을 구입해갔다. 개도국 농산물 제값 주고 사기 운동이 큰 호응을 얻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커피 농가들 큰 보탬

    해마다 3월 첫째 주와 둘째 주는 ‘페어 트레이드(Fair Trade)’ 주간이다. 개도국 농산물 제값 주고 사기 재단(http://www.fairtrade.org.uk)이 주관해 영국 전역에서 행사가 펼쳐진다. 비영리법인인 재단은 생산자와 도매상의 계약내용과 품목을 검사해 개도국 농산물 제값 주고 사기 상표를 부여한다.

    8회를 맞은 올해 행사는 여느 해보다 큰 관심을 모았다. 페어 트레이드 판매액과 품목이 급증했다는 희소식 덕분이다. 재단에 따르면 페어 트레이드 상표를 인증받은 품목이 2003년엔 150개에 그쳤으나 지난해 말 834개로 크게 늘어났다. 또 판매액도 1억4000만 파운드(약 2800억원)로 전년도에 비해 무려 51%나 늘었다.

    1998년 처음 행사를 개최했을 때는 시민들의 반응도 저조했고 인지도도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최근 시민 인지도를 조사한 결과 영국인의 40%가 “페어 트레이드를 알고 있으며 가급적 페어 트레이드 상품을 구입한다”고 답했다. 가장 많이 판매된 품목은 커피. 지난해 말 모두 5000만 파운드(약 1000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이어 바나나가 600억원이 넘게 팔렸고 초콜릿이 270억원, 차가 260억원어치 판매됐다.



    페어 트레이드 확대에 발벗고 나선 곳은 정부기관이다. 2001년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등은 매점과 식당에서 페어 트레이드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 지방정부도 이 운동에 호응, 판매액과 품목이 늘어나는 데 기여했다. 또 대형 백화점과 커피전문점도 한몫 거들었다. 유명 백화점 막스앤드스펜서가 지난해 9월 매장 내 커피전문점에서 판매되는 품목 모두를 페어 트레이드 상품으로 교체했다. 커피전문점 체인 코스타 커피와 스타벅스에서도 페어 트레이드 커피를 주문할 수 있게 됐다. 자선단체 옥스팸은 농업협동조합과 제휴해 지난해 제1호 페어 트레이드 커피숍을 연 데 이어 앞으로 3년 이내, 전국에 20개의 페어 트레이드 전문 커피 매장을 열 계획이다.

    올해 행사에서는 에티오피아 농민 대표가 참석, 페어 트레이드가 개도국 농민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큰 관심을 끌었다. 에티오피아 오로미아 지역의 커피재배농업협동조합의 이사장인 테이데시 메스켈라는 ‘제값 주고 사기’를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닌, 개도국과 선진국 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 모델”이라고 말했다.

    테이데시 이사장의 이야기는 이렇다. 지난 6년 동안 커피 가격은 생산원가에 미치지 못했다. 이 지역 농민들은 커피를 팔면 팔수록 빚을 떠안게 됐다. 빈곤에 허덕여 집 지붕의 철도 떼어내 팔아야 했을 정도다.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 빈민촌에 정착해 막노동꾼으로 전락한 농민들도 속출했다. 고향에 남은 젊은이들은 범죄에 가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3년 전 페어 트레이드 상표를 지정받아 5년간 장기 판매 계약을 맺었다. 이후 대규모 농장에서 시장에 내다 파는 가격보다 높은 가격, 원가보다 높은 가격에 커피를 판매하게 됐다. 테이데시는 “이 운동은 개도국 생산자와 선진국 소비자 간의 상생관계 모델”이라며 “이 운동으로 세계가 한 가족임을 실감하게 됐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테이데시는 영국 각지에서 강연을 계속해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페어 트레이드 재단의 해리엇 램 사무차장도 이 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차원이 아닌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개도국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의 대부분은 가격 변동이 심하다. 가격 폭락은 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지난해 말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해일과 같은 참혹한 결과와 비교할 수 있다고 램 사무차장은 설명한다. 그는 “지진해일 같은 자연재해는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개도국 농민의 빈곤은 예측 가능하며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선진국 국민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개도국 농민을 충분히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英, 전쟁 비용에 비하면 원조액 ‘새발의 피’

    이를 위해 재단은 대규모 농장이 아닌 개도국의 소농, 특히 농민단체와 접촉해 생산자와 판매자를 연결해준다. 페어 트레이드 상표를 지정받으면 농민들은 일반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장기계약을 맺는다. 해마다 예측이 불가능한 가격 때문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또 환경 친화적 경작을 장려하기 때문에 지구촌은 일거양득을 얻는다.

    이런 페어 트레이드는 자유무역을 구호로 내세운 세계화 운동이 제3세계 국민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기보다는 빈곤을 초래하고 있다는 일부의 비판을 수용한 것이다. 자유무역의 과실이 특정 집단이나 국가에 많이 돌아가는 세계화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페어 트레이드는 말로만 자유무역을 외칠 것이 아니라, 개도국 농민과 장기계약을 맺어 안정된 가격을 확보해주는 것이 빈곤 퇴치에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높은 복지 수준을 누리고 있는 선진국 시민들이 불과 몇 십원이나 몇 백원을 더 주고 페어 트레이드 상표가 부착된 품목을 구입하면 개도국과 선진국 간의 새로운 상생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간지 가디언은 페어 트레이드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물론 개도국과 후진국에 대한 원조도 대폭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선진국의 개도국 지원은 실천보다 말이 앞서는 게 현실이다.

    러시아를 포함한 선진 8개국의 의장국인 영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 탕감과 원조 증액을 주요 의제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외교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지진해일 원조에서도 드러났듯, 주요 선진국들은 피해 국가들에 이자 유예만 약속했을 뿐 부채 탕감에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개도국과 후진국에 대한 개발원조 액수와 항상 대비되는 것이 이라크 전쟁 비용이다. 전쟁 2년째인 현재 영국 정부는 115억 달러(약 12조원)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특별회계로도 충당이 되지 않아 돈을 빌려와 전쟁에 투입했다. 국방비로 엄청난 돈을 쓰기 때문에 한정된 정부 예산으로는 다른 곳에 지원할 여력이 없다. 반면 영국 정부가 지진해일 피해 국가에 지원을 약속한 1억2100만 파운드(약 2200억원)는 이라크 주둔 영국군에 15일 정도 들어가는 비용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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