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보안국(SBU) 수장인 바실 말류크 국장과 나란히 서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모스크바에서 죽은 러시아 장군
이 스쿠터에는 TNT 100~300g이 사용된 폭탄이 장착돼 있었다. 이곳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크렘린궁에서 7㎞가량 떨어져 있다.
러시아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은 이 사건의 용의자로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에 포섭된 우즈베키스탄 출신 남성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 용의자는 전동 스쿠터에 폭탄을 설치한 뒤 차량 공유 서비스에서 빌린 차량에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해 감시하다가 키릴로프 중장이 나오자 원격으로 폭탄을 폭파했다고 자백했다. 용의자는 임무 대가로 우크라이나로부터 10만 달러(약 1억4700만 원)와 유럽연합(EU) 국가로의 도피를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키릴로프 중장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투 지역이 아닌 곳에서 사망한 군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있는 SBU 본부.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의 모사드
영국 ‘가디언’은 “키릴로프 사살은 SBU의 가장 대담한 작전으로, 크렘린궁과 러시아군 고위 인사는 물론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이젤 굴드 데이비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모스크바의 현직 장군을 표적으로 삼는 우크라이나의 능력은 러시아 엘리트는 물론, 국민을 크게 당황하게 했다”며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 가장 중대한 암살”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러시아 국민은 군 고위 간부가 수도 한복판인 크렘린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암살당하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영국 BBC는 “이 암살은 모스크바의 일상을 뚫었다”며 “전쟁이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꼈던 러시아 국민이 이제는 전쟁을 실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SBU 측은 자신들이 키릴로프 중장 암살의 배후라고 인정했다. SBU 한 관리는 자신들이 특수작전을 시행한 것이라면서 관련 영상을 언론 매체에 제공했다. 이 관리는 “키릴로프 중장은 전범이자 완전히 합법적인 표적”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키릴로프 중장 암살 전날 금지된 화학무기를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그를 기소한 바 있다. SBU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화학무기를 사용한 사례가 4800건이 넘는다고 비난해왔다.
미국 국무부도 2024년 5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쓰인 독가스인 클로로피크린을 사용한 것을 확인했으며, 영국과 캐나다 등 서방 국가들은 키릴로프 중장을 우크라이나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한 혐의로 제재 대상에 올렸다.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반박해왔다.
‘우크라이나의 모사드’로 불리는 SBU는 군부 소속인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양대 정보기관이다. SBU는 옛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으로,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당시 KGB의 조직, 인력, 네트워크 상당 부분을 물려받아 출범했다. 방첩 활동과 테러리즘 격퇴가 주요 임무인 SBU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인 돈바스 지역에 분리주의 괴뢰정권을 세우자 러시아를 상대로 한 특수작전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SBU는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제5총국’을 만들고 미국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적진 후방에서 공작하는 노하우를 배웠다. 당시 SBU 국장이던 발렌틴 날리바이첸코 의원은 2014년 친러시아 인사들을 조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우크라이나 독립(1991) 이후 태어난 젊은 사람들로 요원을 대폭 교체했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2023년 2월 28일(현지 시간) 연방보안국(FSB)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크렘린궁]
드론으로 특수작전 펼쳐
SBU의 또 다른 대표적인 특수작전으로 2024년 9월 19일 러시아 트베리주 토로페츠시에 있는 미사일 창고에 대한 드론 공격을 들 수 있다. 이 창고에는 지대공요격미사일 S-300과 S-400, 단거리탄도미사일 이스칸데르, 항공 유도 폭탄 KAB, ‘북한판 이스칸데르’ KN-23 등 다양한 미사일 수십 기와 각종 포탄이 보관돼 있었다. SBU 요원들은 이 창고에 은밀하게 침투해 레이저 장치를 설치한 뒤 우크라이나군이 드론으로 공습하도록 유도했다. 당시 드론 공습에 따른 폭발은 우주에서도 관측됐을 뿐 아니라, 규모 2.8 지진이 감지될 정도였다. SBU는 5월 26일 국경에서 1500㎞ 떨어진 러시아 오르스크시 부근의 핵공격 조기 탐지 레이더 시설을 공격하는 등 특수작전에 드론을 주로 사용해왔다.
SBU의 전체 인원은 3만여 명이며 공식 요원에 포함되지 않는 ‘공작원’도 많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3만5000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SBU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정보기관 MI5의 7배, 모사드의 4배나 된다. 러시아 내에서도 비밀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SBU는 주로 반(反)체제 성향 러시아인이나 옛 소련에 속했던 국가의 국민을 포섭해 암살, 파괴, 도청 작전 등을 벌여왔다. 날리바이첸코 의원은 “SBU는 그동안 러시아 군부와 정보기관 관련 정보, 데이터를 많이 수집했다”며 “세작을 심어두고 적 영토에서 통신을 도청하거나 파괴 공작을 해왔다”고 밝혔다.
SBU가 최근 이른바 ‘그림자 전쟁’을 대폭 강화하는 것은 전선에서의 불리함을 보완하고 러시아군 고위 장성과 정치 지도자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SBU의 특수작전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이유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조만간 취임하고 러시아가 동부 전선에서 진격하는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주도권을 잡으려는 우크라이나의 의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키릴로프 암살은 SBU의 가장 대담한 작전으로, 크렘린궁과 러시아군 고위 인사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실 말류크 SBU 국장은 “침략자의 모든 범죄 행위를 응징해야 한다”면서 앞으로도 그림자 전쟁을 강화할 것임을 강조했다.
맞붙은 러·우 정보기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FSB 본부.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