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8일 멕시코시티에서는 주식 토르티야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오른쪽).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멕시코 서민의 주식인 옥수수 전병 토르티야 가격이 최근 400%나 상승해 일부는 영양실조에 직면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인의 주식인 파스타도 밀값 상승 여파로 9월 들어 가격이 20%나 올랐다. 이탈리아는 국민 1인당 연간 28kg의 파스타를 소비한다. 이 나라 소비자보호협회에 따르면 이번 가격 인상으로 가구당 연간 700유로(약 92만원)의 가계 부담 증가가 예상된다고 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다행히 멕시코나 이탈리아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공비행하는 국제 곡물가격이 국내 물가에 끼치는 영향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11월1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10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 상승한 것으로 파악됐다. 2% 초반대에 머물던 올해 물가상승률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배고픔 공포 ‘토르티야 시위·파스타 파업’
이 같은 물가 상승은 고유가와 함께 향후 우리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전망이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최근 “(고유가에 따른) 경기 하강보다 물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때”라고 강조하면서 “현재 우리 경제 수준에서 물가가 3% 이상 상승하면 경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10월29일 펴낸 보고서에서 “곡물 원유 등의 국제 가격 상승세가 중국에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도 인플레이션 요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피부에 와닿는 생활물가 상승이 여기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데 있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 12월 밀가루제품 가격을 7~10% 올린 데 이어 9월에도 13~15% 인상했으며, 대한제분 등 다른 밀가루 제조업체들도 조만간 가격을 인상할 조짐이다. 올해 2월 신라면 가격을 600원에서 650원으로 올린 농심도 “원가 상승 부담이 여전하다”고 토로한다.
빵, 과자, 아이스크림 가격도 조만간 오를 것으로 보인다. 파리크라상, 삼립, 샤니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식품 전문업체 SPC그룹의 한 관계자는 “연초 밀가루 가격이 약 25% 올라 제조원가가 12~13% 상승했다”면서 “이런 현실을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해 제품 가격 인상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제과·제빵 1위 업체인 롯데제과 관계자도 “원가 상승에 따라 과자, 아이스크림 가격을 20~30%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부 논의가 있다”며 “내년 초부터 단계적으로 가격을 올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가축이 먹는 배합사료의 가격 상승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배합사료 시장에서 30%의 점유율을 보이는 농협은 올해 들어 6.5~6.8%씩 세 차례나 배합사료 가격을 인상했다. 배합사료의 주원료인 옥수수 밀 대두 등의 수입가격이 적게는 80%에서 많게는 300% 가까이 오른 것이 그 이유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곡물가격뿐 아니라 해상운임도 지난해 11월 t당 45달러에서 5월 말 현재 118달러로 240%나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배합사료 가격 상승은 아직 소비자 부담으로까지 이어지진 않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생산비 증가가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양돈협회 안혜성 과장은 “올해 사료비가 30%나 증가했지만 돼지고기 출하가격이 kg당 2700원에 그쳐 한 마리 출하하는 데 4만~5만원씩 손해 보고 있다”면서 “국제 곡물가격 상승과 시장개방 사이에 끼여 축산농가만 죽어나는 셈”이라고 토로했다.
지구온난화·가뭄으로 생산량 급감
중국 산시성에서 옥수수를 수확 중인 농부.
물론 이 같은 대폭적인 곡물가격 인상은 빵이나 과자 같은 ‘간식거리’의 가격 상승으로 끝나지 않고 전반적인 생필품 물가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옥수수를 원료로 사용하는 제품은 토르티야나 팝콘뿐 아니라 일회용 기저귀, 비닐봉투, 쓰레기봉지, 광택 나는 잡지 표지, 스포츠 음료 등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곡물가격 상승의 주범은 바이오 원료다. 미국 유럽 등 서방세계의 대체에너지 장려 정책에 따라 옥수수가 바이오 에탄올의 원료로 쓰이면서 곡물가격 인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올해 미국에서 에탄올 생산에 쓰이는 옥수수는 약 8000만t으로 전체 생산량 3억300만t의 26%에 이를 전망이다. 옥수수 8000만t이면 우리나라 전 국민이 연간 소비하는 전체 곡물(2000만t)의 4배에 이른다. 한편 에탄올 디젤로 자동차 한 대의 연료통을 채우려면 200kg의 옥수수가 필요한데, 그 정도면 1인당 연간 곡물 소비량과 맞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 유럽은 향후 대체에너지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어서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심화되면 됐지 나아지진 않을 전망이다. 미국은 2010년까지 에탄올 생산량을 현재보다 6배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도 2020년 안에 경유와 디젤 총소비량의 10%를 바이오 연료로 대체할 계획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급기야 잔 지글러 유엔 식량권 특별보고관은 10월26일 바이오 연료 생산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면서 “빈곤층에 닥칠 재앙을 막기 위해 앞으로 최소 5년간은 바이오 연료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곡물가격 상승의 또 다른 원인은 지구온난화 현상과 계속되는 가뭄이다. 실제 지난해 호주는 밀농사 흉년으로 밀 수출국에서 밀 수입국으로 처지가 180도 바뀌면서 국제적인 밀값 상승을 주도했다. 올해도 동유럽 지역의 폭염, 유럽연합의 폭우, 호주의 가뭄으로 밀 생산량이 30~60%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이 같은 국제 곡물가격 상승은 ‘식량 위기’로까지 이어질까.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살 수 없는 상황을 식량 위기로 가정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그런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미국 농업부(USDA)가 10월12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07~
2008년도 세계 곡물 생산량은 20억7243만t이며 소비량은 20억9377만t이다. 소비량이 생산량을 초월했지만 그 차이는 2134만t에 그친다.
해외농장 투자 등 식량 확보 대비해야
문제는 곡물수출국의 ‘금수조치’하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실제 중국 동북지역에서 들여오던 중국산 옥수수가 중국 내 소비 증가와 중국 정부의 금수정책으로 2006년 상반기 이후 자취를 감추면서 옥수수 가격이 더 인상된 측면이 있다. 한국사료협회 홍순찬 기획팀장은 “중국산 옥수수가 미국산에 대한 견제 구실을 했는데, 이마저도 시장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질서상 특정 국가가 자국 농산품에 대해 전격적으로 금수조치를 내리긴 어렵다는 한계가 있지만, 지난해 호주처럼 ‘팔고 싶어도 팔 게 없는’ 상태가 될 경우 금수조치나 다름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 특히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률이 5%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로서는 이러한 ‘가상 시나리오’는 최악일 수밖에 없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식량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해외농장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소 성명환 연구위원은 “유전 개발을 하듯 해외농장에 적극 투자해 장기적인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또 “국제 곡물시장에서 선물거래에 참여하는 국내 기업과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마저도 곡물수출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식량위기 해법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세계화, 지구온난화가 이미 우리의 밥그릇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