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SK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올해 65세. 최고령 우승 감독이다. 영원한 2인자, 단기전과 큰 승부에 약하다는 그간의 평가를 깬 것이다. 다시 묻게 된다. 김성근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그냥 야구인”이라고 대답한다. 기자가 보기에 그는 늘 변화하는 사람이다. 안주하지 않고 노마드처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게 김성근이다.
김성근은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야인 시절 스포츠신문 객원 해설위원을 할 때는 왼손으로 쓱쓱 원고를 써서 건넸다. ‘감히’ 고치기 힘들 만큼 명문이다. 정리된 생각으로 처음과 끝이 상응한다. 말과 글은 곧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을 ‘옳고 바르게’ 전달할 수 있으니 그는 천생 지도자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아서 김성근은 돋보인다. ‘촌철(寸鐵)’로 ‘살인(殺人)’하는 그의 말로 ‘사람 김성근’의 면모를 살펴보자.
“한번 맺은 인연 가벼이 여기지 말라”
프로야구 초반 김성근과 지금의 그는 많이 다르다. 그는 의심이 많고 남을 잘 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혈혈단신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건너와 야구를 했다. 저쪽(일본)에서도, 여기서도 온전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변인이 세력을 키우려면 간을 빼주면서까지 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확인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는 이 사람이 자기 사람인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점검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이런 기질은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삼성-태평양 감독을 역임할 때 가장 심했다. 구단과 갈등을 빚을 때는 “누가 감독 방에 도청장치를 한 것 아니냐”며 농반 진반을 건넸다. 기자의 전날 술자리와 그때 나온 이야기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정보가 승부를 가른다는 사실을 당시에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편향된 정보가 그를 외곬 야구인으로 만들었던 게 사실이다. 김성근을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반대세력도 많았던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김성근은 한번 맺은 인연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자기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때 특히 그렇다. 프로세계를 떠난 야구인, 일자리를 잃은 후배 코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뛴다. 그가 최악의 조건에서 감독생활을 하던 시절은 쌍방울이었는데, 이때 따르던 코치들은 지금도 ‘김성근 사단’으로 불린다. 이들은 돈을 갹출해 김성근의 회갑연을 열었다.
“모든 사람은 그에 맞는 용도가 있다”
정규시즌이 끝난 뒤 그는 “필요하지 않은 선수는 한 명도 없다. 모두 쓸모 있다”고 흘리듯 내뱉었다. 정규시즌 1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지만, SK엔 개인 타이틀 수상자가 한 명도 없다. 톱타자 정근우,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는 중심타자 이호준이 막판까지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을 정도다.
김성근은 활용 가능한 모든 인원을 쏟아붓고 최적의 결과를 낸다. 사람에 대한 정보와 관심, 데이터 활용능력이 없다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용병술이다. 올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차지한 김재현의 활약은 백미였다.
LG 감독이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을 때, 그는 김재현을 대타로 냈다. 김재현은 당시 고관절 괴사증으로 더 이상 선수 생활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타를 때려냈다. 김성근의 말이다.
“그때가 김재현의 마지막 야구 인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더니, 올해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사람과의 인연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됐다.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엔 야구책 수북, ‘도서관 방불’
김성근은 야구를 단 한 번도 고통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을 야구에 맞춰 살아왔단다. 그는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고 뛰는 ‘65세 청년’이다.
“감독이란 직업은 사리사욕을 떠나 희생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감독의 정년은 없다. 열의만 있다면 60대든 80대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수년 전 해외출장에 앞서 모 코치와 전화통화를 하던 중에 “뭐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묻자 그 코치는 신간 골프책 제목을 대며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김성근의 집에는 수백 권의 야구책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야구책이 많다는 곳보다 더 많다고 한다. 자기 일, 자기 분야에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다 마침내 정상에 선 지도자를 본 적이 있는가. 기자는 없다.
김성근은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야인 시절 스포츠신문 객원 해설위원을 할 때는 왼손으로 쓱쓱 원고를 써서 건넸다. ‘감히’ 고치기 힘들 만큼 명문이다. 정리된 생각으로 처음과 끝이 상응한다. 말과 글은 곧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을 ‘옳고 바르게’ 전달할 수 있으니 그는 천생 지도자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아서 김성근은 돋보인다. ‘촌철(寸鐵)’로 ‘살인(殺人)’하는 그의 말로 ‘사람 김성근’의 면모를 살펴보자.
“한번 맺은 인연 가벼이 여기지 말라”
프로야구 초반 김성근과 지금의 그는 많이 다르다. 그는 의심이 많고 남을 잘 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혈혈단신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건너와 야구를 했다. 저쪽(일본)에서도, 여기서도 온전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변인이 세력을 키우려면 간을 빼주면서까지 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확인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는 이 사람이 자기 사람인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점검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이런 기질은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삼성-태평양 감독을 역임할 때 가장 심했다. 구단과 갈등을 빚을 때는 “누가 감독 방에 도청장치를 한 것 아니냐”며 농반 진반을 건넸다. 기자의 전날 술자리와 그때 나온 이야기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정보가 승부를 가른다는 사실을 당시에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편향된 정보가 그를 외곬 야구인으로 만들었던 게 사실이다. 김성근을 추종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반대세력도 많았던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김성근은 한번 맺은 인연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자기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때 특히 그렇다. 프로세계를 떠난 야구인, 일자리를 잃은 후배 코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뛴다. 그가 최악의 조건에서 감독생활을 하던 시절은 쌍방울이었는데, 이때 따르던 코치들은 지금도 ‘김성근 사단’으로 불린다. 이들은 돈을 갹출해 김성근의 회갑연을 열었다.
“모든 사람은 그에 맞는 용도가 있다”
정규시즌이 끝난 뒤 그는 “필요하지 않은 선수는 한 명도 없다. 모두 쓸모 있다”고 흘리듯 내뱉었다. 정규시즌 1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지만, SK엔 개인 타이틀 수상자가 한 명도 없다. 톱타자 정근우,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는 중심타자 이호준이 막판까지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을 정도다.
김성근은 활용 가능한 모든 인원을 쏟아붓고 최적의 결과를 낸다. 사람에 대한 정보와 관심, 데이터 활용능력이 없다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용병술이다. 올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차지한 김재현의 활약은 백미였다.
LG 감독이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을 때, 그는 김재현을 대타로 냈다. 김재현은 당시 고관절 괴사증으로 더 이상 선수 생활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타를 때려냈다. 김성근의 말이다.
“그때가 김재현의 마지막 야구 인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더니, 올해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사람과의 인연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됐다.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엔 야구책 수북, ‘도서관 방불’
김성근은 야구를 단 한 번도 고통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을 야구에 맞춰 살아왔단다. 그는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고 뛰는 ‘65세 청년’이다.
“감독이란 직업은 사리사욕을 떠나 희생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감독의 정년은 없다. 열의만 있다면 60대든 80대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수년 전 해외출장에 앞서 모 코치와 전화통화를 하던 중에 “뭐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묻자 그 코치는 신간 골프책 제목을 대며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김성근의 집에는 수백 권의 야구책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야구책이 많다는 곳보다 더 많다고 한다. 자기 일, 자기 분야에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다 마침내 정상에 선 지도자를 본 적이 있는가. 기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