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영 기자]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 산업 분야인 5G(5세대), 자율주행 전기자동차, 드론, 사물인터넷(IoT) 등은 모두 리튬 이온 배터리를 사용한다. 첨단 전자산업의 근간이 배터리인 셈이다. 이에 국내외 대기업들이 차세대 배터리 연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LG화학, 삼성SDI 등 국내 3사는 물론, 중국도 천문학적 비용을 배터리 연구에 쏟아붓고 있다. 전기차업체까지 포함하면 중국이 지난해 배터리 산업에 투자한 금액은 7419억 위안(약 127조5000억 원)에 이른다.
리베스트는 휘어지는 리튬 이온 배터리(플렉시블 배터리) 개발에 성공, 배터리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해외 기업 중에도 플렉시블 배터리 제품을 내놓은 곳이 있다. 하지만 제대로 휘어지지 않거나, 성능이 일반 배터리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리베스트의 플렉시블 배터리는 자유롭게 휘어지면서 일반 배터리와 성능 차이도 없어 각광받고 있다. 리베스트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 2020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다. 김주성 리베스트 대표(사진)를 2월 27일 KAIST(한국과학기술원) 내 사무실에서 만났다.
3세대 플렉시블 배터리
리베스트의 플렉시블 배터리. [지호영 기자]
“리튬 이온 배터리는 리튬 이온이 전해질 속에서 양극과 음극을 옮겨가며 전류를 축전·방출하는 제품이다. 재료를 설명하면 크게 양극, 음극, 분리막, 전해질 등 4개 요소로 나뉜다. 이 요소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배터리의 성능과 모양이 달라진다. 가장 익숙한 것은 고정된 모양의 파우치형 배터리다. 일반 건전지와 유사한 원통형 배터리도 있다. 원통형 배터리가 1세대, 파우치형 배터리가 2세대라면 우리 제품은 자유롭게 휘어지는 3세대 플렉시블 배터리다.”
배터리가 휘어질 때 분리막이 손상되거나 불이 날 염려는 없나.
“리튬 이온 배터리는 금속을 여러 장 쌓아서 만든다. 리튬 이온이 양극을 움직이며 전기를 축전·방출하는 원리다. 이때 이온이 움직이던 자리가 변하면 안 된다. 하지만 금속을 휘면 이온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할 위험성이 생긴다. 이 경로를 안정화하는 것이 기술력이다. 현재 리베스트는 안정화에 성공해 플렉시블 배터리 제품을 양산할 수 있다.”
배터리가 휘어진다기에 처음엔 작은 배터리를 병렬식으로 연결한 제품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면 배터리 용량이 줄어든다. 작아서 용량이 적고, 연결되는 부분이 배터리 역할을 하기 어려워 크기와 무게에 비해 성능도 떨어진다. 리베스트의 플렉시블 배터리는 연결 부분도 전부 배터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파우치형 배터리와 같은 정도의 성능을 낼 수 있다.”
CES 2020 혁신상 수상 이유
CES 2020에 참가한 리베스트는 혁신상을 받았다. [사진 제공 · 리베스트]
“휘어진다고 해서 다른 배터리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타사 플렉시블 배터리는 기존 배터리에 비해 충전량이나 전압이 떨어지고, 한 번 휘어지면 모양을 바꿀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리베스트의 플렉시블 배터리는 일반 배터리와 성능이 같다. 현재 상용화된 배터리 가운데 가장 성능이 좋은 NCM811도 최근 플렉시블 배터리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성과 덕분에 CES 2020에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배터리가 휘어지면 뭐가 좋은지 궁금해하는 소비자들이 있다.
“IT(정보기술) 관련 제조업계에 새로운 레고 블록을 만든 셈이다. 휴대전화로 예를 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과거 폴더형 휴대전화를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휘어지는 회로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디스플레이가 휘어지면서 액정이 접히는 스마트폰이 나오고 있다.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배터리 때문에 설계나 디자인 면에서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플렉시블 배터리는 이 제약을 크게 줄여줄 것이다. 게다가 일반 배터리의 성능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휘어진다는 새로운 물리적 환경을 견디기 위해서는 더 발전된 재료와 이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를 일반 배터리에 적용한다면 더 나은 성능의 배터리를 개발할 수 있다. 리베스트의 현 기술만으로도 일반 배터리의 충전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으리라 본다.”
플렉시블 배터리는 주로 어떤 제품에 들어가게 될까.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몸에 닿는 기기인 만큼 형태가 정해진 파우치형 배터리보다 플렉시블 배터리를 쓸 수 있는 기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워치다. 현재 스마트워치는 배터리 때문에 성능을 희생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작은 기기에 배터리 자리까지 마련하느라 생긴 일이다. 전력이 많이 드는 부분은 스마트폰에 맡기는 등 스마트폰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플렉시블 배터리를 시곗줄에 넣는다면 이 같은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상용화됐지만 아직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타트업은 없던 시장을 개척하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웨어러블 시장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IT업계에서는 스마트폰 다음으로 혁신이 일어날 모바일 기기로 스마트워치, 무선 헤드폰 등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꼽는 사람이 많다. 구글은 지난해 11월 웨어러블 디바이스 업체 ‘핏빗’을 21억 달러(약 2조5000억 원)에 인수했다. 지금 당장은 성능이 좋지 않지만 스마트폰과 비슷한 수준의 성능과 유용성을 갖춘다면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거액을 들여 인수한 것이다.”
웨어러블은 스마트폰의 미래
IT업계가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뭘까.“웨어러블은 사용자가 매력적으로 느끼거나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제품이라기보다 생산자들이 사용자에게 팔고 싶어 하는 제품이다. 스마트폰이 사용자의 위치, 자주 검색하는 단어 같은 정보를 모을 수 있다면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항상 몸에 닿아 있는 만큼 더 많은 데이터 수집이 가능하다. 심박수, 하루 평균 운동량 등 현재 스마트워치로 모을 수 있는 건강 관련 데이터는 물론, 뇌파 등 자극에 대한 반응도 수집할 수 있다. 기업은 이렇게 모인 데이터를 분석해 더 세밀한 마케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각 개인의 건강 데이터를 갖고 있는 회사가 있다면 보험사들은 큰돈을 주고서라도 그들의 데이터를 받고 싶어 할 것이다.”
웨어러블업계 외에 플렉시블 배터리가 쓰일 만한 곳이 더 있을까.
“최근에는 드론업계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헬기형 드론 외에 비행기를 닮은 고정익 드론에서도 용처를 찾을 것 같다. 드론 개발사들은 비행기 몸체 대신 날개에 배터리를 넣고 싶다며 관심을 보였다. 사실 수요는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배터리가 들어가지 못했던 공간에 진출할 수 있으니 배터리를 쓰는 모든 업계가 수요처다.”
리베스트의 목표는 뭔가.
“일단 시장에서 리베스트의 제품을 설득하는 일이 급선무다. 용처가 없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시제품을 만들어 사용처를 여럿 발굴할 예정이다. 완성한 제품으로는 애플워치 충전용 밴드가 있다. 일반 손목시계 밴드와 디자인이 같은데, 밴드 내부에는 플렉시블 배터리가 들어 있다. 손목 중심부 빈 공간에 애플워치를 붙이면 급속 충전이 된다. 기존 애플워치는 한 번 충전하면 2~3일 쓸 수 있지만, 이 제품을 사용하면 7~10일까지도 충전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이 제품을 통해 시장에 플렉시블 배터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