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잎싹이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도 어려운 한정된 공간에서 수많은 암탉과 함께 알 낳는 일을 하는 잎싹. 알을 낳으면 품어보지도 못한 채 데구르르 굴러가는 모습만 바라봐야 하는 잎싹. 그는 다른 닭과는 많이 다르다. 스스로 ‘잎싹’이라고 이름도 지었고 열린 문 밖 세상을 동경하며 마당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도 갖고 있다. 열린 문 밖의 마당은 꽤 재미있어 보이고, 매일 마당을 누비는 마당 식구들이 왠지 친근해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며칠 굶으면 힘이 없어 쓰러지겠지. 그럼 내가 죽은 줄 알고 주인이 내다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자유로워질 테고, 그럼 마당에서 재미있게 살아야지.’
드디어 잎싹은 졸도하고 주인은 잎싹을 농장 밖으로 내다버린다. 하지만 잎싹은 마당 식구들의 텃세에 농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청둥오리 나그네와 수달 달수 씨, 그리고 여러 종류의 아름답고 귀여운 새들과 만나 자리를 잡는다.
하루하루 즐겁고 재미있게 지내던 잎싹은 어느 날 밤 먼발치서 족제비를 보게 된다. 그리고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 나그네의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알을 본다. 수많은 알을 낳았지만 정작 알을 품어본 적이 없는 잎싹은 귀여운 알을 품는다. 그 모습을 본 청둥오리 나그네는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면 늪으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 알을 노리던 족제비와 혈투 끝에 목숨을 잃는다.
알에서 탄생한 아기는 초록머리를 가진 오리. 잎싹은 아기에게 초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성심성의껏 키운다. 하지만 엄마는 닭인데 아기는 오리라며 놀리고 수군거리는 이웃들 때문에 초록이가 상처받을까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귀여운 초록이가 부쩍부쩍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초록이가 제법 성장해 청년 티가 날 즈음 계절이 바뀌고 한 떼의 청둥오리가 날아오자 잎싹은 초록을 보내야 할 때가 됐음을 느낀다.
이야기 구조 속에서 잡히는 맥락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엄마’다. 잎싹은 많은 알을 낳지만 품을 수도 없고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들을 볼 수도 없어 엄마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잎싹의 가장 큰 소망은 알을 품는 것, 그래서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를 보고 그 새끼를 키우는 것이리라. 양계장에서 알을 낳는 수많은 닭 가운데 하나가 아닌 일반 암탉에게는 당연한 일을 잎싹은 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어떤 닭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잎싹에게는 소망이 됐다.
그런 잎싹이 엄마가 된다. 비록 자신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진짜 자기 새끼는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따스하게 품어 부화시킨 새끼를 통해 비로소 엄마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초록을 지극 정성으로 키우고 보살피며 엄마가 된다. 늪에 사는 다른 새들은 그런 잎싹이 이상했을 수도 있다. 제 알도 아닌데 품어 부화시키고, 제 새끼도 아닌데 남들 시선 아랑곳하지 않은 채 키워내는 잎싹에게 비웃음을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엄마가 된 잎싹은 소망을 이루었기 때문에 따가운 시선도, 날카로운 말도, 차가운 외면도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엄마가 된 잎싹이 치러야 할 의례가 더 있다. 계절이 바뀌어 이제는 제법 청년이 된 초록의 마음이 왠지 설레고 두근거리던 그때 청둥오리 떼가 날아오고, 그들을 본 엄마 잎싹은 아들 초록을 보내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한다.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 나그네의 아들인 초록은 역시 그와 같은 동족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잎싹은 초록의 엄마이기 때문에 초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초록을 언제 떠나보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래서 엄마 잎싹은 찢어지게 아픈 마음을 살살 달래며 초록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새끼들을 낳은 뒤 먹을 것이 없어 젖이 나오지 않는 족제비에게 - 자신을 잡아먹으려 했고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 나그네를 잡아먹은 -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며 새끼들을 잘 먹이라고 말하는 잎싹은 진정한 엄마가 된다. 눈물 흘리며 의연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잎싹도 엄마지만, 그런 잎싹의 마음을 전달받고 역시 눈물 흘리며 잎싹에게 덤벼드는 족제비 역시 엄마인 것이다.
엄마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이 작품은 몇 가지 서브 장르를 갖고 있다. 잎싹이 마당을 동경하는 것은 자유에의 표현이며, 마당을 나와 야생에서 사는 것은 모험이다. 알에서 깨어난 초록이 파수꾼이 되기까지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며, 나그네와 족제비의 대결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작품이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서 번잡하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오히려 적당히 첨가된 다층구조가 이야기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주면서 마음을 움직인다. 유명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기본 이야기 구조를 잘 가져왔고 새로운 캐릭터를 집어넣어 풍성하게 배치했다. 초록이 파수꾼이 되기 위해 도전한 비행경주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이 있다.
이 작품은 공들인 흔적이 꽤 많다. 그중 하나가 선 녹음, 후 작화, 본 녹음 시스템이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성우들이 더빙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목소리 캐스팅을 끝낸 후 미리 녹음해 목소리와 캐릭터의 입이 맞지 않는 기술적 단점을 보완했다. 녹음할 때 드러나는 배우들의 감정과 표정, 행동을 반영해 생생한 캐릭터를 그려냈다. 그렇게 배우들의 목소리와 싱크로율이 높게 작화를 마친 후 다시 본 녹음에 들어가 작품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모든 스태프가 한 컷 한 컷 정성 들여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한 해가 지나 때가 되면 초록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이 늪으로 날아올 것이다. 마당에서 잡혔을 때 발목에 묶였던 붉은색 리본을 달고서. 밤새 엄마가 부리로 쪼아 잘라냈지만 매듭을 풀 수 없어 그대로 놔둔 붉은색 리본을 달고서.
“그래, 이건 그냥 놔두기로 하자. 그래서 내가 널 알아볼 수 있도록 하자”던 엄마의 말을 마음에 품고서 초록은 동료들과 함께 날아올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엄마였던 잎싹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바로 엄마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 또한 그렇게 성장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며칠 굶으면 힘이 없어 쓰러지겠지. 그럼 내가 죽은 줄 알고 주인이 내다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자유로워질 테고, 그럼 마당에서 재미있게 살아야지.’
드디어 잎싹은 졸도하고 주인은 잎싹을 농장 밖으로 내다버린다. 하지만 잎싹은 마당 식구들의 텃세에 농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청둥오리 나그네와 수달 달수 씨, 그리고 여러 종류의 아름답고 귀여운 새들과 만나 자리를 잡는다.
하루하루 즐겁고 재미있게 지내던 잎싹은 어느 날 밤 먼발치서 족제비를 보게 된다. 그리고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 나그네의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알을 본다. 수많은 알을 낳았지만 정작 알을 품어본 적이 없는 잎싹은 귀여운 알을 품는다. 그 모습을 본 청둥오리 나그네는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면 늪으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 알을 노리던 족제비와 혈투 끝에 목숨을 잃는다.
알에서 탄생한 아기는 초록머리를 가진 오리. 잎싹은 아기에게 초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성심성의껏 키운다. 하지만 엄마는 닭인데 아기는 오리라며 놀리고 수군거리는 이웃들 때문에 초록이가 상처받을까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귀여운 초록이가 부쩍부쩍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초록이가 제법 성장해 청년 티가 날 즈음 계절이 바뀌고 한 떼의 청둥오리가 날아오자 잎싹은 초록을 보내야 할 때가 됐음을 느낀다.
이야기 구조 속에서 잡히는 맥락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엄마’다. 잎싹은 많은 알을 낳지만 품을 수도 없고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들을 볼 수도 없어 엄마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잎싹의 가장 큰 소망은 알을 품는 것, 그래서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를 보고 그 새끼를 키우는 것이리라. 양계장에서 알을 낳는 수많은 닭 가운데 하나가 아닌 일반 암탉에게는 당연한 일을 잎싹은 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어떤 닭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잎싹에게는 소망이 됐다.
그런 잎싹이 엄마가 된다. 비록 자신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진짜 자기 새끼는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따스하게 품어 부화시킨 새끼를 통해 비로소 엄마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초록을 지극 정성으로 키우고 보살피며 엄마가 된다. 늪에 사는 다른 새들은 그런 잎싹이 이상했을 수도 있다. 제 알도 아닌데 품어 부화시키고, 제 새끼도 아닌데 남들 시선 아랑곳하지 않은 채 키워내는 잎싹에게 비웃음을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엄마가 된 잎싹은 소망을 이루었기 때문에 따가운 시선도, 날카로운 말도, 차가운 외면도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엄마가 된 잎싹이 치러야 할 의례가 더 있다. 계절이 바뀌어 이제는 제법 청년이 된 초록의 마음이 왠지 설레고 두근거리던 그때 청둥오리 떼가 날아오고, 그들을 본 엄마 잎싹은 아들 초록을 보내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한다.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 나그네의 아들인 초록은 역시 그와 같은 동족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잎싹은 초록의 엄마이기 때문에 초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초록을 언제 떠나보내야 하는지도 알았다. 그래서 엄마 잎싹은 찢어지게 아픈 마음을 살살 달래며 초록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새끼들을 낳은 뒤 먹을 것이 없어 젖이 나오지 않는 족제비에게 - 자신을 잡아먹으려 했고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 나그네를 잡아먹은 -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며 새끼들을 잘 먹이라고 말하는 잎싹은 진정한 엄마가 된다. 눈물 흘리며 의연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잎싹도 엄마지만, 그런 잎싹의 마음을 전달받고 역시 눈물 흘리며 잎싹에게 덤벼드는 족제비 역시 엄마인 것이다.
엄마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이 작품은 몇 가지 서브 장르를 갖고 있다. 잎싹이 마당을 동경하는 것은 자유에의 표현이며, 마당을 나와 야생에서 사는 것은 모험이다. 알에서 깨어난 초록이 파수꾼이 되기까지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며, 나그네와 족제비의 대결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작품이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서 번잡하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오히려 적당히 첨가된 다층구조가 이야기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주면서 마음을 움직인다. 유명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기본 이야기 구조를 잘 가져왔고 새로운 캐릭터를 집어넣어 풍성하게 배치했다. 초록이 파수꾼이 되기 위해 도전한 비행경주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이 있다.
이 작품은 공들인 흔적이 꽤 많다. 그중 하나가 선 녹음, 후 작화, 본 녹음 시스템이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성우들이 더빙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목소리 캐스팅을 끝낸 후 미리 녹음해 목소리와 캐릭터의 입이 맞지 않는 기술적 단점을 보완했다. 녹음할 때 드러나는 배우들의 감정과 표정, 행동을 반영해 생생한 캐릭터를 그려냈다. 그렇게 배우들의 목소리와 싱크로율이 높게 작화를 마친 후 다시 본 녹음에 들어가 작품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모든 스태프가 한 컷 한 컷 정성 들여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한 해가 지나 때가 되면 초록은 동료들과 함께 다시 이 늪으로 날아올 것이다. 마당에서 잡혔을 때 발목에 묶였던 붉은색 리본을 달고서. 밤새 엄마가 부리로 쪼아 잘라냈지만 매듭을 풀 수 없어 그대로 놔둔 붉은색 리본을 달고서.
“그래, 이건 그냥 놔두기로 하자. 그래서 내가 널 알아볼 수 있도록 하자”던 엄마의 말을 마음에 품고서 초록은 동료들과 함께 날아올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엄마였던 잎싹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바로 엄마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 또한 그렇게 성장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엄마를 키워드로 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