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했던 386 영혼의 타락 그리고 메마른 러브스토리](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07/01/08/200701080500001_2.jpg)
그런 그가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소설 ‘오래된 정원’은 글이 바위였다. 오래 감옥살이한 작가의 물화된 경험 위에 단단한 묘사가 물을 주어, 인생을 건네주고 사회적 고통을 돌려받은 386세대의 애달픈 비가, 그러나 감상도 후회도 없이 걷고 말하고 옷을 입은 것 같은 80년대가 거기 있었다. 그 촘촘한 리얼리즘의 그물을 뚫고 임상수가 무엇을 건져올릴지 궁금했다. 기대가 됐다.
17년 감옥살이 동안 어머니는 복부인으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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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2000년대가 1980년대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386 운동권 판타지로 회귀하는 2000년대이기도 했다. 따뜻한 이야기이자, 임 감독 말대로 러브 스토리인데 감정의 누수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임상수의 냉소가 모성과 사랑, 그리움 같은 당의정에 싸여 눅눅해졌는데도 그 진심을 믿어야 할지 말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남자는 감옥살이한 지 17년 만에 세상에 나와, 복부인이 된 어머니에게서 아르마니 양복을 건네받는다. 휴대전화라는 물건을 처음 접하고, 벽 없이 모든 것이 트인 세상이 낯설기만 하다. 운동권이던 그는 지난 17년 동안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지내왔다. 지갑 속 낡은 증명사진으로만 존재해온 여자. 그러나 여자는 암으로 죽었고,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났던 산골, 갈뫼에 다시 스며든다. 17년 전 그날처럼. 그날의 공기가 현재의 추억과 뒤섞인다.
남자가 혼자 ‘도바리(도망)’ 생활을 하다 동료들이 걱정된다며 떠나던 날, 고무신 신고 첨벙 빗속에 서 있던 여자는 “숨겨줘, 재워줘, 먹여줘, 몸 줘. 근데 왜 가니?”라며 울 듯 말 듯 속을 삼킨다. 이 말 참 맞다. ‘몸매 죽여, 씩씩해, 잘 벌어, 애 낳아줘. 근데 어떻게 떠나니?’
주인공과 직접적 연관 없는 역사적 사건들은 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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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윤희는 현우(지진희 분)가 감옥에 간 뒤, 그의 후배인 영작이 데모의 선봉에 나서는 걸 막기 위해 그와 몸을 섞는다. 모성 안에서 도망이란 면죄부를 얻는 그것 역시 운동권 판타지의 일부가 아닌지. 그래서 세트머리를 한 후리후리한 팔등신 미인 염정아는 매우 멋있지만 그녀의 시선으로 재단한 80년대는 운동화 신고 학교 다녔던 또 다른 386 여자아이들에게는 어쩐지 계속 겉도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현우도 영작도 노조운동을 하는 운동권 여학생과는 영원히 친구일 수밖에 없는 설정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뒷맛 같은 것 말이다.
그 겉도는 감정은, 임상수가 80년대가 애초에 배태했던 감상성과 관객의 사이를 끊임없이 벌리려 들면서 더 큰 이물감으로 비화한다. 임상수는 순결했던 386세대의 영혼은 타락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깨운다. 감옥에서 수의 한 벌로 지냈던 남자가 유기농 식사를 하고 아르마니 슈트를 입는다. 그의 어머니는 복부인이 됐다. 뜨거운 가슴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했던 후배는 인권변호사가 돼 시시한 바람이나 피운다. 운동권들의 사상 논쟁을 입만 클로즈업하는 화술은, 현 운동권이 ‘입만 살아 있는 것들’이라는 임상수식 직설의 냉소나 다름없다. 거기에 386세대의 회고담이 맞물려 영화는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임 감독은 현우와 윤희의 관계에 직접적 연관이 없는 80년대의 역사적 사건들에까지 시선을 보내는 것일까? 5·18 광주민주화운동, 건국대 점거사건, 노동운동 중의 분신. 자세히 보면 이 장면에는 현우나 윤희, 영작 누구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 주인공들이 역사의 격랑 한복판에 있었던 ‘그때 그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일례로 감독은 광주에서 아버지 영정을 들고 있는 소년의 눈망울을 화면에서 복원해낸다. 영정 속 꼬마 조천호 씨의 그 눈망울이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이자 사멸해가는 80년대 이미지라면, 임상수는 애써 그것을 하나의 객관화된 현실로 현실 속의 한 지점으로 되돌이키려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마음이 끌리는 개인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임상수의 또 다른 시대를 발화하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 그 쿨하고 건조한 거리가 시대를 바라보는 적절한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러나 실제로 그 밑바닥에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거대담론을 선점하려는 어떤 태도, 한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란 부동산을 남들이 건드리기 전에 차지하려는 욕망 같은 게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가 남겨준 의문 하나 … 안 슬픈데 왜 울려고 하지?
나는 임상수 영화를 보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 있었다. 임 감독이 주류 사회에 보내는 태도가 냉소적인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화면 속 주인공들에게조차 애정이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을까. 혹은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 드는 더 단순한 생각 하나. 안 슬픈데 왜 울려고 하지? 임 감독은 우리 안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욕망을 헤집으며 도발적인 주제를 도발적으로 다룰 때 가장 멋지다. 그러니 부디 오래오래 ‘바람난 감독’으로 남기를. 오래된 386의 뜨락에서 안 나오는 눈물 짜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