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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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 주모, 5000년 전 수메르에 있었다

[명욱의 술기로운 세계사]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한 ‘시두리’가 기록에 나타난 첫 주모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입력2024-04-04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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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극에 등장하는 직업 가운데 가장 친숙한 직업을 뽑으라면 주모를 선택할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술의 어머니’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모는 방문객에게 넉넉한 양의 국밥과 막걸리를 건네면서 등장한다. 하지만 주모가 일하는 장소인 주막을 단순히 하룻밤 묵으며 먹고 마시는 장소로만 봐서는 안 된다. 과거 주막은 물건을 맡아주거나 금속 화폐를 지폐로 바꿔주는 등 다양한 일을 처리했고, 국경 근처에 위치할 경우 환전소 역할도 수행했다. 고급 주막은 일반인과 고위 관리 등이 머물며 다양한 정보를 나누는 첩보 공간이기도 했다.

    최초 주모와 주막은 언제 등장했을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첫 주막은 인류 최초 문명으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학 석학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는 저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에서 기관이나 풍습 등 39개가 수메르 문명에서 최초로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학교부터 의학, 법학, 농업, 판례, 사랑 노래까지 다양한데, 최초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서사시에는 최초 주모와 그가 거주했던 주막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길가메시를 만난 수메르 주모

    최초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인류 첫 주모인 ‘시두리’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다. [GETTYIMAGES]

    최초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인류 첫 주모인 ‘시두리’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다. [GETTYIMAGES]

    서사시란 영웅 일대기를 담은 문학작품을 가리킨다.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서 배우 마동석이 연기해 친숙한 길가메시는 본래 수메르의 대표 도시국가였던 우르크의 왕이었다. 그는 3분의 1은 인간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신이었다고 한다. 길가메시는 우르크를 126년간 다스렸는데, 자신의 힘을 믿고 백성을 많이 괴롭혔다. 강해 보이는 남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은 물론,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는 초야권을 행사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보다 못한 창조의 여신 닌후르사그는 흙으로 길가메시에 대항할 존재를 만들었다. 그가 바로 훗날 길가메시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엔키두다. 문제는 엔키두가 반은 사람이고 반은 동물인 ‘반인반수’인 탓에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전쟁의 여신 이난나를 섬기는 여사제 샴하트가 엔키두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엔키두는 술과 빵을 먹으며 샴하트와 6박 7일을 보냈고 이 과정에서 야수성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으로 거듭난 엔키두는 길가메시와 승부를 벌였고, 그를 참회시킨다. 이후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신들에게 도전하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이 여정에서 엔키두는 죽음을 맞는다. 친구를 잃은 가슴 아픈 경험을 한 길가메시는 영생을 찾아 떠나는데 이때 시두리를 만난다. 시두리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최초 주모라고 볼 수 있다. 와인·맥주 양조의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이기도 한 그는 주막과 흡사한 공간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시두리는 우연찮게 영생을 찾아 방황하는 길가메시의 넋두리를 듣는다. 길가메시는 자신이 영생을 찾아 방황하다가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시두리는 길가메시에게 영생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신들이 인간에게 죽음을 붙여줬고,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이유에서다. 시두리가 지혜의 여신으로 불리는 이유다.

    성경과 닮은꼴 여럿

    길가메시 서사시가 적힌 점토판. [위키피디아]

    길가메시 서사시가 적힌 점토판. [위키피디아]

    길가메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가운데 유일하게 영생을 얻은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간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성경 창세기와 유사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홍수를 피하고자 방주에 동물들을 한 쌍씩 태운다든지, 땅을 발견했을 때 새를 보낸다든지 등 비슷한 내용이 많다. 우트나피쉬팀은 성경 속 노아처럼 홍수를 피하려고 방주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방주를 만들 때 노동자들에게 삯으로 맥주와 와인을 줬다고 한다. 성경에는 노아가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유사하게 와인이 등장하는 셈이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애원하고, 결국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아낸다. 길가메시는 끝내 불로초를 구하지만 방심한 사이 뱀이 불로초를 먹어버리고 만다. 결국 길가메시는 꿈에서 신들로부터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후 자신의 행적을 돌에 새기고 백성들 앞에서 의연하게 죽는다. 이와 별개로 뱀이 허물을 벗는 것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 불로초를 먹었기에 허물을 벗으며 계속 새살을 내민다는 것이다.

    기원전 2750년 무렵 수메르 문명을 배경으로 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2000년쯤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서사시는 점토판에 기록된 덕분에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는데, 점토판의 영문명은 우리에게 친숙한 태블릿(tablet)이다. 4000~5000년 전 이야기지만 인간의 희로애락과 욕망, 그리고 최초 주모와 와인, 맥주 등에 관한 내용은 물론, 태블릿의 어원까지 알 수 있다는 점이 길가메시 서사시가 재미있는 이유다. 수메르 문명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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