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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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 끝내준다!” 연휴에 읽기 좋은 추리소설 3선

[도진기 작가의 추리소설 추천] 유키 하루오 ‘방주’, 엘러리 퀸 ‘열흘간의 불가사의’, 히가시노 게이고 ‘악의’

  • 도진기 변호사·추리소설 작가

    입력2025-01-2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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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젤다의 전설’ ‘엘든 링’ 같은 게임을 하다 보면 엄청난 흡인력에 놀라게 된다. 겨우 몇만 원으로 이만큼의 행복이라니. 게임 회사에 감사 편지라도 보내고 싶어진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매체와 경쟁에서 추리소설이 생존할 수 있을까. 순문학이라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추리문학은 엔터테인먼트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소설을 위협하는 건 게임만이 아니다. 라디오, TV를 넘어 영화와 드라마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일상에 들어왔다. OTT도 이제 유튜브에 위협받는 실정이다. 가히 엔터테인먼트가 폭발하듯 넘쳐나는 시대다.

    유키 하루오의 추리소설 ‘방주’와 엘러리 퀸의 ‘열흘간의 불가사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국내판 표지(왼쪽부터). [블루홀식스 제공, 검은숲 제공, 현대문학 제공]

    유키 하루오의 추리소설 ‘방주’와 엘러리 퀸의 ‘열흘간의 불가사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 국내판 표지(왼쪽부터). [블루홀식스 제공, 검은숲 제공, 현대문학 제공]

    ‘그럼에도’ 생존한 추리소설의 매력

    한편으로 또 다른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은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500년 전 호롱불 아래서 읽던 ‘홍길동전’은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거의 유일한 오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고 힘 좋은 경쟁자가 속속 등장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 보내기’ 수단으로서 책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점은 놀랍다. 기술 발달로 일취월장하는 게임이나 영화와 달리 글자라는 수단은 수백 년간 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추측해볼 수 있지만, 인간 마음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보고 묘사하는 수단이 ‘글’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다른 매체가 따라오기 힘들다. 좋은 작품을 읽고 나면 ‘재밌는 시간’ 외에 오래 남는 다른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 든다. 그 ‘고양감’과 ‘성장’을 우리는 놓지 못한다. 하지만 오직 ‘재미’ 측면으로만 보더라도 추리소설만이 줄 수 있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그 매력을 발산하는 한 추리문학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TV가 대중화되자 라디오가 다 죽는다며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팝송이 히트했지만 라디오가 살아남았듯이.

    연휴에 읽을 추리소설로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런 기준으로 선정했다. 추리소설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선명한 작품, 나아가 인간을 보는 시야를 조금은 넓혀주는 작품. 다른 공통점도 있다. 모두 ‘내가 탄식했던 소설’이다. 아래 작품들의 책장을 덮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유키 하루오(夕木 春央)의 ‘방주(方舟)’는 ‘추리소설만이 줄 수 있는 재미’ 항목에서 내 기준 만점이었다. “반전이 끝내준다”는 말을 듣고 읽었는데, 책을 덮으며 어느새 나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반전이 끝내준다!” 온갖 매체의 온갖 반전에 노출된 독자도 이 소설 결말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조금 법석을 떨자면 “브루스 윌리스가 ◯◯” 이래 가장 뛰어난 반전이 아닐까 싶다. 사건이 작위적이라는 평도 있는 듯한데, ‘일어날 법한 일’만 일어난다면 뉴스나 해외토픽이 왜 있겠는가. 조금만 마음을 연다면 우리는 걸작을 손실 없이 즐길 수 있다. 이것이 추리문학의 독보적 매력이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 중 ‘내가 가장 탄식한 소설’은 엘러리 퀸(Ellery Queen)의 ‘열흘간의 불가사의(Ten Days’ Wonder)’다. 엘러리 퀸의 작품은 고전 중 고전인데, 이 책은 뛰어난데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하며 더 보람을 느낀다. 책 내용의 3분의 2쯤 지났을 때 탐정 엘러리는 돌연 마지막 살인을 막아야 한다며 뛴다. “도대체 무엇으로 추리한다는 거지?” 황당하다. 증거도, 목격자도, 구체적인 사건성조차 없다. 하지만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어떤 살인보다 논리적인 추리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온다.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대담한 개연성이라고 평하고 싶다. 이 작품이 뭐지 싶더라도 인터넷에서 굳이 찾아보지 말기를 권한다. 특정 단어가 뒤따라 붙은 경우가 많은데, 그게 실은 스포일러다. 거대한 얼개가 마지막에 떠오르며 깨달음의 전류가 뇌 전체로 ‘찡’하고 퍼지는 경험을 부디 해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판사에게 권하는 ‘인간 탐구물’

    히가시노 게이고(東野 圭吾)의 ‘악의(惡意)’는 추리소설을 빙자한 인간 탐구물이다. 대단히 시니컬하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 밑바닥의 어둠, 그런 것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무척이나 잘 그려놓다 보니 이것이 실은 피 칠갑하거나 욕설이 난무하는 소설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인간을 발가벗겨 놓았는데도, 독자는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이 정도 걸작은 작가의 개인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고서는 쓰기 힘들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중 인물처럼 유명 작가로서 이유 없는 악의의 대상이 된 경험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강하게 추정해본다. 조금 엉뚱한 얘기지만 판사들도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작품은 ‘편견’과 ‘선입견’에 관한 고민을 던진다. 판결문에서 가끔 “피고인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으므로 살인 동기가 없다” 같은 서술을 보면 너무 안이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런 이유로도 살의를 품을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텍스트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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