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흐르는 개천 풍경. 관광객을 태운 조각배가 개천가에 늘어선 수양버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동아DB]](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WEEKLY/Article/67/c1/3b/c0/67c13bc000ffd2738276.jpg)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흐르는 개천 풍경. 관광객을 태운 조각배가 개천가에 늘어선 수양버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동아DB]
구라시키 미관지구에 들어서니 하얀색 벽과 검은색 기와가 어우러진 창고 건물 등에서 옛 정취가 물씬 풍겼다. 무엇보다 미관지구 중심을 관통하는 청계천만 한 개천이 인상적이었다. 구라시키강으로 불리는 물에서 백로가 노닐고, 개울가에 수양버들이 도열하듯이 늘어선 가운데 관광객을 태운 조각배가 한가로이 수로를 헤집고 다녔다.
흥미로운 건 이 강이 자연 하천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래 구라시키 미관지구 일대는 남쪽 세토 내해(瀬戸内海·세토나이카이)로 빠져나가는 다카하시강 하구 갯벌 인접지였다. 그러다 에도시대에 간척사업을 하면서 물길을 이용하기 어려워지자, 구라시키 중심부까지 물자를 운반할 목적으로 인공 운하인 구라시키강을 만든 것이다. 강 조성 후 이 일대는 세토 내해를 거쳐 들어오는 각지의 수많은 물자가 집결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물자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 딸린 저택(藏屋敷·구라야시키)이 수로를 따라 늘어서게 된 배경이다.
배산임수 전형 보여주는 에도시대 상업 도시
![개천가 수양버들 뒤로 보이는 오하라 가문 저택. 금학포란형 명당 터다. [안영배 제공]](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WEEKLY/Article/67/c1/3b/f1/67c13bf1079ed2738276.jpg)
개천가 수양버들 뒤로 보이는 오하라 가문 저택. 금학포란형 명당 터다. [안영배 제공]
관광차 이곳을 찾은 필자는 물길과 산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명당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구라시키강을 끼고 있는 마을 뒤로 해발 40m, 동서 길이 500m 규모의 쓰루가타산(鶴形山)이 든든하게 서 있다. 일본인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이 산에는 불교 진언종 계열 사찰 칸류지(觀龍寺)와 오카야마현 천연기념물 등나무로 유명한 아치(阿智)신사 등 여러 종교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쓰루가타산은 이름 그대로 학이 부채꼴 모양으로 날개를 펼친 형태를 하고 있는데, 미관지구가 바로 이 학의 양 날개가 감싼 위치에 있다. 간척사업과 도시화로 지형이 다소 바뀌긴 했지만, 이곳은 풍수적으로 ‘금학포란형’(金鶴抱卵形: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명당 터로 불릴 만했다. 금학포란형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기운이 응기(應氣)된 터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 기업가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1880~1943)의 옛 저택이었다. 이곳은 오하라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에도시대 후기인 1795년 건축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했다. 1971년에는 ‘구(舊) 오하라가(家) 저택’이라는 이름으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집에 살았던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선대에게 많은 부를 물려받은 금수저 출신이지만, 타고난 사업 수완으로 선대보다 더 큰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풍수적 시각에서 그가 살던 집터는 부호를 배출하는 재물 명당 터 기운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이 저택은 풍수에 밝은 일본 음양사(陰陽師)의 도움을 받아 건축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영향을 받아 발전한 일본 풍수
사실 일본 풍수는 한국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서기’는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 564년 10월 일본 궁실에 천문·지리·역술 관련 책들을 가져왔고, 일본 선비 3~4명이 관륵에게 이를 배웠다고 전한다. 한중일 풍수 문화를 연구해온 사토 세이지(佐藤誠治) 일본 국립 오이타대 명예교수는 중국에서 유래한 풍수 사상이 한국과 대만에 영향을 미쳤고 일본까지 전해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일본의 경우 한국만큼 풍수 사상이 크게 확장되지는 못했다. 이는 화산, 지진 활동이 빈번한 자연 조건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에도시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구라시키 미관지구 풍경. [안영배 제공]](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WEEKLY/Article/67/c1/3c/47/67c13c471ee1d2738276.jpg)
에도시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구라시키 미관지구 풍경. [안영배 제공]
한편 오하라 저택의 재물 명당 기운은 그 맞은편 오하라 미술관으로도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전통 가옥 사이에서 그리스 신전처럼 지어진 석조 건축 양식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 미술관은 1930년 문을 연 일본 최초 근대미술관이자 사립미술관이다.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설립한 이 미술관은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모네, 고갱, 마네, 세잔, 피카소, 칸딘스키 등 세계적인 거장의 원작들을 전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 소장품만 3500점이 넘는다고 한다. 이 작품들을 보려고 지금도 일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 작은 소도시를 찾고 있다. 명당 터에 명작의 기운까지 더해지니 세계 관광객들이 찾아올 만하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휴관일이라 건물 내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오하라 미술관 탄생 배경에는 두 친구의 깊은 우정이 있다고 한다.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화가인 고지마 도라지로(兒島虎次郞·1881~1929)를 전폭적으로 후원해 유럽에서 유학하게 해줬고, 고지마는 오하라의 배려를 갚고자 유럽에서 명작을 수집했다. 안타깝게도 고지마가 4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오하라는 친구를 기리는 마음으로 미술관을 설립했다. 이처럼 문화예술에 아낌없는 지원을 한 오하라는 후대 일본인에게 엄청난 가치의 문화유산을 남겨준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선 기업가
‘매의 눈은 10년 앞을 본다(わしの眼は十年先が見える)’라는 책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일본 기업가 가운데 매우 독특한 삶을 산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방 도시 구라시키의 한 방적 회사를 일본 굴지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뛰어난 경영자인 동시에 고아원, 병원, 노동자를 위한 학교 등을 설립하고 후원한 사회복지가이기도 했다. 그는 영리사업과 사회사업을 동시에 하는 자신을 가리켜 “나막신과 신발을 함께 신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에서 얻은 자산은 모두 사회에 돌려준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일본 아동복지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이 주지(石井十次·1865~1914)다.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 등 제국주의 행보를 보이면서 국내에 수많은 고아가 생겼는데, 이시이 주지는 아동 보호 등 사회복지 사업에 열정적이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그의 실천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자취가 밴 곳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경북 경주 교동 최부잣집과 전남 구례 운조루가 자연스레 머리에 떠올랐다. 300년간 12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일군 최부잣집은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지켰다. 운조루 역시 굶주린 사람이면 누구나 언제든 쌀을 가져가도록 쌀독을 놓아두는 등 더불어 사는 삶을 오랫동안 실천한 장소다. 그러고 보니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흐르는 개울은 최부잣집 앞으로 흘러가는 하천과 운조루 앞마당을 흐르는 개울과도 유사했다. 물론 오하라 저택처럼 최부잣집과 운조루 역시 최고의 재물 명당 터다. 이처럼 부잣집 풍수는 국경을 초월해 공통점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