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된 김오키 [포크라노스]
분야를 막론하고 시상식의 주인공이 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였지만 이 소감이야말로 시상식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상자가 봉투를 열어 이름을 호명하면 1미터 안팎 높이의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받는 수상자의 얼굴과 말에서는 숨길 수 없는 희로애락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특히 그가 수상에 익숙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수상자 발표 후 시상식의 본질이 모습을 드러낸다. 노래의 1절 분량도 되지 않는 그 시간 안에 앨범 1장 분량의 드라마가 있다. 1년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치열하게 보낸 이들이 인생의 첫날처럼 벅찬 얼굴을 보여주는 현장인 것이다.
블랙리스트 파동 때도 버텼는데
한국대중음악상_2020 수상명단. [한국대중음악상 공식 홈페이지]
2004년 시작된 이 시상식은 17년간의 행사를 늘 쉽지 않게 치렀다. 거대 미디어나 기업이 주최하는 게 아니었기에 예산은 늘 한정적이었다.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던 이유다. 가장 큰 위기는 2009년 찾아왔다. 첫 행사부터 함께했던 문화체육관광부가 행사를 얼마 남기지 않고 갑자기 지원을 끊은 것이다. 처음 행사를 함께 주최한 문화연대를 비롯해, 선정위원 중 ‘좌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었다.
초유의 사태에 시상식 없이 수상자 발표만 할 뻔했던 찰나, 가수 김민기가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을 제공해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이듬해에도 상황은 같아서 서울 강남의 복합문화공간 SJ쿤스트할레에서 조촐하게 치러야 했다.
‘돈은 없어도 가오는 지켰던’ 한국대중음악상은, 그러나 올해 결국 시상식을 치르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여파였다. 2월 초순까지만 해도 2013년부터 매년 시상식이 열린 서울 구로구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작게나마 열 계획이었으나 개최를 사흘 앞둔 2월 24일 끝내 취소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그 전주에 코로나19 경보 상황이 ‘위험’으로 격상됐기 때문이다.
올해 시상식이 취소돼 아쉬웠던 이유는 우선, 이번 한국대중음악상의 주인공이 대부분 그동안 상복이 없던 음악인이거나 처음으로 후보에 올라 바로 트로피를 받는 음악인이었기 때문이다. 수상할 때 표정과 수상소감이 무척 궁금했는데, 그 모습과 소감을 보고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기록에도 남을 수 없게 됐다.
잔나비, 천용성, 조휴일, 김오키
잔나비(왼쪽). 검정치마의 조휴일. [잔나비 공식 인스타그램, 비스포크]
늘 양질의 앨범을 발표했음에도 상복이 없었던 검정치마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4번째 앨범 ‘THIRSTY’는 발표와 동시에 페미니즘 이슈로 논란이 됐지만 밴드 리더이자 모든 노래를 만드는 조휴일은 일절 대응 없이 조용히 활동했다. 올해 최우수 모던록 음반을 수상했기에 그가 시상식장에서 어떤 말을 꺼낼지 자못 궁금했다.
무엇보다 올해의 음악인으로 뽑힌 김오키의 표정이 어땠을지 보고 싶었다. 방탄소년단, 김현철, 림킴, 백예린, 잔나비 등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후보 사이에서 대중적 지명도가 가장 떨어지는 김오키가 주인공이 됐다. 오랫동안 선정위원으로 참여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 결과는 가장 파격적이었다(최종 수상자 투표에서 그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표가 몰렸다).
선정위원 강일권의 평 일부를 옮겨본다. “정말 거침없고 창조적이며, 끝내주게 왕성한 행보다. 연주자이자 프로듀서 김오키는 2019년에도 본인의 작품과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을 바쁘게 넘나들었다. 자연스레 커리어의 무게감도 더해졌다. 김오키는 완성도를 담보한 다작의 아이콘이다. 무엇보다 음악사이트에서 분류, 그러니까 오로지 재즈만으로 그의 음악을 정의해선 곤란하다. (중략) 정말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색소폰을 분다. 김오키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리스펙트(respect)를 받아야 하며, 더 많이 조명돼야 한다.”
백예린과 림킴
백예린. [JYP엔터테인먼트]
올해의 음반 수상자를 놓고 최후까지 경합을 벌인 이는 림킴이다. 그도 1994년생으로 아직 한창 20대를 보내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한국 대중음악 창작과 퍼포먼스의 무게 중심이 어디로 이동해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아닐까.
고백하건대 몇 년간 즐겨 듣고 기억에 흔적을 남긴 한국음악은 대게 여성이 만들고 부른 게 많았다. 성별로 음악을 판단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도한 흐름은 있다. 이는 한국 사회, 나아가 세계 흐름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믿는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은 그 흐름의 헌 좌표를 보여주는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