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욱의 술기로운 생활

‘에일 와이프’와 ‘주모’가 그립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술집문화 … 당분간 집에서 나 홀로 ‘홀짝’ 불가피

  • 주류 문화 칼럼니스트

    입력2020-03-02 14: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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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에일하우스 사진이 실린 신문. [뉴욕타임스]

    영국 에일하우스 사진이 실린 신문. [뉴욕타임스]

    술은 농경문화와 역사를 함께한다. 서양문명의 시초이자 인류 최초로 농경생활을 한 수메르(Sumer) 문명은 맥주를 빚은 기록을 갖고 있다. 술 제조뿐 아니라 판매, 즉 술집에 대한 기록도 있다. 

    기원전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술집 외상값에 대한 지침이 나온다. ‘60실라(1실라는 0.5ℓ)의 맥주를 외상으로 줄 경우 추수 때 곡식을 50실라 받으라’ 등의 내용이다. 맥주를 마시는 그림도 전해지는데, 당시 맥주에는 부유물이 많고 벌레가 자주 빠져 빨대로 마시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 펍의 전신이 마녀의 소굴?

    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모습이 새겨진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왼쪽)과 로마시대 술집 타베르나 삽화. [Acient Pages, Capitolivm]

    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모습이 새겨진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왼쪽)과 로마시대 술집 타베르나 삽화. [Acient Pages, Capitolivm]

    기원전 5세기부터는 그리스의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술집이 본격적으로 번성했다. 로마는 건국 초기 주로 맥주를 만들어 마셨지만, 기원전 168년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로는 와인으로 그 중심을 옮겨갔다. 한국 주막처럼 숙박시설이 함께 있는 술집 ‘타베르나(taverna)’가 이때부터 생겨났는데, 술의 신 디오니소스 표식을 달아 다른 식당과 구별했다. 

    프랑스에 와인을 가져다준 것도 로마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로마 멸망 후 가톨릭 수도원이 포도밭과 술 제조를 맡아 오래도록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모든 수도원의 영지가 몰수된 이후부터는 요즘 같은 술집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카페(caffe)’와 ‘카바레(cabaret)’다. 카페문화는 아랍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거쳐 프랑스로 넘어왔는데 커피 외에도 와인, 증류주에 허브를 넣은 리큐어(liqueur)도 팔았다. 술과 음악, 사교, 공연을 동시에 즐기는 카바레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 시절 가장 유명한 카바레는 파리 ‘물랭루주(Moulin Rouge)’로, 2001년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프랑스 파리의 카바레 물랭루주(왼쪽)와 독일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 [Moulin Rouge, Hofbrauhaus America]

    프랑스 파리의 카바레 물랭루주(왼쪽)와 독일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 [Moulin Rouge, Hofbrauhaus America]

    영국의 전통 술집 하면 펍(pub)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펍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펍에 앞서 영국에는 영국 맥주 에일(ale)을 파는 에일하우스(ale house)가 있었다. 여성이 집에서 가양주(家釀酒)로 빚어오다 10세기 전후에 이를 식당에서 판매하면서 에일하우스가 생겨났다. 

    에일하우스 주인은 술을 담당하는 여성이라는 뜻에서 ‘에일 와이프(ale wife)’로 불렸다. 우리말로 하면 주모(酒母)인 셈이다.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에일 와이프는 마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당시 맥주에 다양한 허브가 들어가 맛이 안정되지 않았고, 종종 환각 작용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에일 와이프는 흑사병이 유행한 14세기부터 마녀사냥을 당하게 된다. 당시 에일 와이프의 상징은 청소할 때 쓰는 빗자루와 눈에 잘 띄기 위한 검은색 긴 모자, 그리고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기 위한 고양이였다. 지금도 마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 에일하우스에서 나온 셈이다. 에일 와이프라는 직업은 16~17세기에 걸쳐 서서히 사라졌다.

    美 금주령 시절 싹튼 홈술·혼술

    금주령시대에 처름 등장한 미국의 히든 바. [The Wall Street Journal]

    금주령시대에 처름 등장한 미국의 히든 바. [The Wall Street Journal]

    그리고 펍이 등장했다. 흑사병이 한바탕 지나간 후 살아남은 농민과 노동자의 수입이 크게 오르면서 다양한 주류를 취급하는 펍이 생겨난 것이다. 본래 펍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 즉 우리말로 모두가 모이는 도가(都家)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일주일 단위로 품삯을 지급하는 주급(週給) 시스템이 정착하면서 펍은 주말마다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 됐다. 

    독일은 유럽의 마지막 종교전쟁이던 30년 전쟁(1618~1648) 때 술집이 일종의 집회장으로 번성했다. 넓은 술집 공간이 식품점, 잡화점, 은행, 군인의 집합 장소 역할까지 한 것이다. 참고로 독일 남부는 당시만 해도 와인이 많이 나왔으나, 30년 전쟁의 폐해로 포도 재배가 어려워져 18세기부터는 맥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16세기부터 양조장을 운영해오던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가 1897년 뮌헨에 양조장 직영 비어홀을 만들었다. 이곳은 3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술집으로, 히틀러가 연설하고 레닌도 다녀갔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1944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이 무너졌으나 1958년 재건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 호프집도 이곳을 참고해 생겨났다. 호프(hof)는 독일어로 정원, 광장이라는 뜻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1920~1933년 금주령이 내려져 술의 제조, 판매, 유통이 금지됐다. 다만 술을 마시는 것은 허용돼, 안 보이는 곳에서 마시면 됐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홈술’문화는 이때부터 싹텄다. 

    금주령 시대라 해도 마실 사람은 마셨다. 1층에 있던 바가 지하로 숨어들면서 히든 바(hidden bar), 주류밀매점(speakeasy bar)이 등장했다. 다만 함께 어울려 마시는 것이 부담스러워 바에서 혼자 마시는 ‘혼술’문화도 나타났다. 당시 판매된 술은 조악한 방법으로 만든 밀주들. 좋지 않은 향이 나다 보니 바텐더들이 다양한 허브와 과일을 섞어 맛을 내면서 칵테일이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미국의 바문화는 제1·2차 세계대전 때 유럽으로 전파됐다. 

    조선시대 주막은 18세기 말 정조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번성한다. 영조가 재위 내내 금주령을 실시한 탓이다. 당시 주막은 서신을 전달하거나 여행자 수표를 발행하는 우체국, 은행 역할도 맡았다.

    김홍도의 ‘주막’.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주막’. [국립중앙박물관]

    구한말부터는 다양한 술집이 등장했다. 24시간 주막인 ‘날밤집’, 팔만 내밀어 잔에 술을 따라주는 ‘팔뚝집’, 서서 마시는 ‘선술집’, 바의 일종인 ‘목로주점’ 등등. 1960~1970년대에는 대폿집과 빈대떡집, 1980년대에는 호프집, 경양식집, 학사주점, 민속주점, 1990년대에는 소주방이 새롭게 등장했다. 서양은 200년 전 술집문화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데, 우리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는 게 아쉬운 대목이다.

    코로나19로 술집문화 어떻게 바뀔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술집에 가는 것이 금기시되는 요즘이다. 다행히 혼술·홈술 문화가 널리 퍼져 혼자 술 마시는 것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그간 만나지 못한 친구, 지인, 동료와 시원하게 한잔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또 그래야 더욱 어려워진 자영업자의 사정도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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