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리 공동목장 안 솔숲에 자리 잡은 캠핑장. 솔숲 위로 한라산이 우뚝하다.
제주시내에서 가시리로 가려면 녹산로를 지나야 한다. 가시리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녹산로는 제주의 대표적인 드라이브코스 가운데 하나다. 봄이면 샛노란 유채 꽃길로 탈바꿈하고, 가을에는 새하얀 억새 길로 변신한다.
해발 90~570m에 자리 잡은 가시리는 전형적인 중산간마을이다. 크고 작은 오름이 13개나 솟아 있고, 오름과 오름 사이에 광활한 목장지대가 펼쳐진다. 말을 방목하거나 훈련시키기에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래서 몽골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부터 말들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임금에게 진상할 말 기른 ‘갑마장’
조선시대에는 마을 북쪽 대록산(大鹿山·큰사슴이오름·474m) 주변에 대규모 국영목장인 녹산장(鹿山場)이 들어섰다. 정조 16년(1792)에 편찬한 ‘제주삼읍지’엔 당시 녹산장이 동서로 75리(30km), 남북으로 30리(12km)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녹산장은 ‘갑마(甲馬)’, 즉 임금에게 진상하는 최상급 말을 길러내는 갑마장(甲馬場)이었다. 갑마장은 1895년(고종 32) 공마(貢馬)제도를 폐지한 뒤 차츰 쇠퇴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가시리 공동목장으로 바뀌었다. 현재 750ha(227만여 평)에 이르는 공동목장 안에 제주 목축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배우고 체험하는 조랑말체험공원이 조성돼 있다.
조랑말체험공원 입구에는 높이 7m, 지름 18m 규모의 ‘행기머체’가 있다. ‘머체’는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머체 위에 ‘행기물’(놋그릇에 담긴 물)이 놓여 있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엎어진 밥공기 모양의 이 돌무더기에 상록수 수십 그루가 뿌리를 내렸다. 비록 무른 현무암이라 해도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나무의 생명력이 참으로 경이롭다. 사실 이 돌무더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크립토돔(cryptodome)이라는 화산쇄설물이다. 땅속 마그마가 지표에 노출돼 굳어진 크립토돔은 ‘지하용암돔’이라고 부른다.
1 오름을 형상화한 조랑말박물관의 옥상 전망대와 가시리 풍력발전단지. 2 땅속 마그마가 지표에 노출돼 만들어진 행기머체. 조랑말체험공원 입구에 있다. 3 가시리 공동목장의 테우리(목동)와 말들을 형상화한 조각작품 ‘테우리의 전설’.
조랑말체험공원에는 캠핑장도 있다. 사실 우리 일행에게 가장 매력적인 공간은 캠핑장이었다. 목장 한쪽 솔숲에 조성한 이 캠핑장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바닥에 파쇄석이 깔렸고, 전기 콘센트함을 군데군데 세운 것 말고는 번듯한 편의시설도 없다. 말 방목장 안에 있는 캠핑장답게 바짝 말라 냄새조차 사라진 말똥이 여기저기 뒹군다. 그래도 우리는 당초의 계획을 바꿔 주저 없이 이곳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다. 뒤로는 한라산이 우뚝하고, 앞으로는 제주 남쪽바다가 아스라이 보이는 중산간지대 목장에서의 캠핑은 상상만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캠핑장은 기대 이상으로 아늑했다. 제주 수호신인 설문대할망 품에 안긴 듯했다. 캠핑장 구역을 몇 걸음만 벗어나도 바람이 거칠게 불어댔지만, 소나무 아래 캠핑사이트에만 들어오면 거짓말처럼 바람 기세가 꺾였다. 캠핑장의 밤은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휘황한 달빛 속에서도 숱한 별빛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조랑말박물관 너머 따라비오름(342m)도 달빛 아래에서 육중한 자태를 드러내 보였다. 흐르는 시간이 아쉬워 한동안 밖에서 서성거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말똥 뒹굴어도 아늑한 그곳
조랑말체험공원 캠핑장의 아름다운 달밤.
쫄븐갑마장길은 조랑말체험공원 입구에서 곧바로 가시천 일대 곶자왈을 가로지른다. 곶자왈이란 용암이 흘러간 곳에 각종 나무와 넝쿨식물이 마치 원시림처럼 얽힌 숲을 말한다. 쾌청한 대낮인데도 아름드리 상록수로 빼곡한 곶자왈 숲은 여명처럼 어둑하다. 가시천은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그래도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어 인근 목장 말들의 샘터 구실을 한다. 어둑한 곶자왈 숲길을 벗어나자 짧은 억새밭 길을 지나서 따라비오름 기슭의 삼나무숲에 들어섰다.
따라비는 ‘땅의 할아버지’란 뜻의 ‘땅할애비’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한자로는 지조악(地祖岳)이다. 근처에 솟은 장자오름, 새끼오름, 모지오름의 큰 어른 격이다. 이 오름은 커다란 굼부리(분화구) 3개로 이뤄진 점이 특이하다. 부드럽고 완만한 산등성이로 이어진 굼부리의 전체 둘레는 2633m로, 한라산의 1720m보다 900m 가까이 더 길다. 하지만 비고(比高·실제 등산하는 높이)는 107m에 불과해 별로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대록산 아래 있는 풍력발전단지 내에 형성된 수크령 군락.
해발 342m의 따라비오름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에 봉긋봉긋한 오름들과 한라산 정상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한 감동이 용솟음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날아갈 듯 상쾌해진다. 굼부리 안팎은 죄다 억새밭이다. 억새가 끝없이 하늘거리고, 산등성이 위에 선 사람들은 연신 비틀거린다. 세상 모든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처럼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하다.
따라비오름 북쪽 초원에는 길게 띠를 이룬 잣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잣성은 국영목장인 갑마장의 경계를 구분하려고 쌓은 돌담이다. 위쪽 상잣성은 갑마장의 말이 한라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쌓았다. 아래쪽 하잣성은 갑마장 말이 농경지에 들어가거나, 주민들이 키우는 소와 말이 갑마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쌓았다. 그리고 하잣성과 상잣성 중간쯤에 위치한 중잣성은 갑마장을 둘로 나눠 농경과 목축을 번갈아 하려고 축조됐다. 오늘날 따라비오름 인근의 잣성은 옛 하잣성의 일부다. 따라비오름을 내려선 쫄븐갑마장길도 이 잣성을 따라 대록산 자락으로 이어진다.
대록산 아래 다목적광장에서는 해마다 4월이면 유채꽃큰잔치가 열린다. 샛노란 유채 꽃이 이 너른 광장과 녹산로 양쪽에 가득 핀 봄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따라비오름 기슭에 있는 무덤을 지키는 동자석.
● 조랑말체험공원 이용 안내
캠핑장 이용료는 전기 사용료를 포함해 1만5000원으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캠핑장 옆에 간이 샤워시설과 화장실, 급수대 등이 있다. 하지만 추운 겨울철에는 이용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캠핑장이나 게스트하우스 이용객은 조랑말박물관 내 샤워실과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조랑말박물관 입장도 무료다. 현장에서 텐트 대여와 장작 구매가 가능하다.
조랑말체험공원은 겨울철(11~3월)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장한다. 조랑말박물관의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승마체험료는 기본코스(1.2km) 7000원, 초원승마A(2.5km) 1만2000원, 초원승마B(3.5km) 2만5000원. 문의 및 예약 064-787-0960, www.jejuhorsepark.com.
● 숙식
가시리의 별미인 돼지두루치기.
가시리는 돼지고기와 순댓국이 맛있기로 소문난 마을이다. 원조집으로 알려진 가시식당(064-787-1035), 맛집으로 유명한 나목도식당(064-787-1202)을 비롯해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돼지두루치기, 제주식 순댓국, 순대국수, 돼지갈비 등을 맛볼 수 있는 이곳 식당은 대개 정육점을 겸한 식육식당이다. 조랑말체험공원 안 식당에서도 미리 예약하면 뷔페식으로 차려진 조랑말백반과 흑돼지 바비큐를 맛볼 수 있다.
● 가는 길
제주국제공항→동문로→국립제주박물관 사거리(직진)→번영로→대천동 사거리(산굼부리 방면으로 우회전)→비자림로→제주목장 입구(가시리 방면으로 좌회전)→조랑말체험공원(제주국제공항에서 약 33km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