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600회를 돌파한 한 웹툰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네이버에 연재 중인 조석의 개그 만화 ‘마음의 소리’는 연재 5주년을 넘어 최근까지 단 한 번의 펑크도 없이 600회를 채웠다. 이는 물론 작가의 성실함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매주 같은 요일에 ‘마음의 소리’ 한 편만 연재하던 것이 이제는 하루에도 십수 편을 올릴 정도로 포털사이트(이하 포털) 플랫폼을 통한 연재 환경이 좋아진 덕이기도 하다. 600회를 따라가는 독자 혹은 팬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과연 마니아적인 현상에 불과할까. 600회에 이르는 동안 조석이 만든 신조어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은 일상에서도 흔히 쓰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 됐고, ‘러그’나 ‘시소’처럼 만화 속 개그 소재로 차용한 어휘는 검색어 순위 수위를 오르내린다. 더불어 최근 1년만 따져보더라도 웹툰 ‘신과함께’는 영화 판권 계약을 맺었고, ‘패션왕’은 드라마 제작이 확정됐으며, ‘쌉니다 천리마마트’도 시트콤 계약을 맺었다. 요컨대 최근 웹툰은 강풀이라는 탁월한 스토리텔러 한 명 정도가 대표하던 초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창작자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내놓으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고유영역으로 성장했다.

양적 증가와 질적 ‘진화’

수많은 작가가 웹툰에 몰리고 수많은 작품을 연재하는 현재 상황에 대해, 웹툰이 정착하기 전부터 만화를 시작했던 이들이 놀라움을 표하는 건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초기 웹툰은 가능성과 비전이 보이는 매력적 신대륙이라기보다 출판 만화라는 과거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불가피한 종착지에 가까웠다. 출판 만화가 만화의 거의 전부이던 시절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 같은 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진짜 사나이’ ‘열혈강호’ 등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도서대여점이 범람한 이후 이 시장은 창작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돼 갔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웹툰 연재를 시작한 포털 다음의 ‘만화속세상’은 출판 시장이라는 플랫폼이 무너지면서 갈 곳을 잃은 만화가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포털은 누리꾼의 유입을 꾀할 콘텐츠가 필요했고, 만화가는 연재할 공간이 필요한 상황. 그 중 다음을 통해 강풀, 강도하 투톱이 연재한 ‘순정만화’와 ‘위대한 캣츠비’, 파란의 양영순이 그린 ‘1001’은 당시만 해도 초기 단계였던 웹툰의 평균 수준을 확 끌어올린 작품이었다. 이후 명랑만화의 대표 주자였던 이충호와 ‘야후’라는 걸작 이후 소식이 뜸했던 윤태호가 ‘무림 수사대’와 ‘이끼’로 웹툰에 합류한 것은 사실 필연적인 결과였다.



최근 몇 년간 웹툰은 단순한 양적 증가뿐 아니라 질적 ‘진화’도 이뤄냈다. 아직 ‘웹투니스트’라 칭할 만한 전문작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다음과 네이버는 웹툰 카테고리에 능력 있는 아마추어가 도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고, 수많은 예비 만화가가 몰려들었다. 지금까지도 안정적 시장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강풀, 강도하 같은 웹툰 1세대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조석, 김규삼, 하일권, 서나래 같은 다음 세대 작가가 웹툰의 영역을 좀 더 넓히면서 독자 팬덤까지 얻는 상황이 벌어지자, 웹툰을 정식 연재하는 포털은 젊은 창작자에게 기회의 땅으로 변모했다.

물론 여전히 정식 연재는 좁은 문이다. 그러나 태블릿을PC를 비롯한 몇몇 도구와 작화 능력만 있다면 웹툰은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게 가능한 매체다. 아무리 인디 영화라 해도 1인 제작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창작 욕구에 시달리는 많은 젊은이가 이 시장에 몰리는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다음에 연재한 ‘R에 관해서’의 이림, 네이버에 연재한 ‘쎈놈’의 박용제와 ‘신의 탑’의 SIU처럼 이 아마추어 도전 공간을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작가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만큼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는 여지도 함께 커졌다. 즉 말하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 작가가 비교적 쉽게 시각적으로 그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공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령 초능력 히어로물인 ‘트레이스’를 그린 네스티캣은 자신의 작화 실력과 흥미로운 세계관만으로도 본격 히어로 장르물을 독자에게 선보이는 게 가능했다. 여러 재능이 한곳에 모인 만큼 스토리텔링과 작화의 협업도 용이하다. 추리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마사토끼의 경우 본인 스스로 만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작품의 성격에 맞는 작가와 함께 ‘커피우유신화’, ‘매치스틱 트웬티’ 같은 독특한 추리물을 내놓는다. 이렇게 해서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중세형 판타지인 ‘데스티니’, ‘진짜 사나이’ 이후 맥이 끊긴 학원 격투물의 전통을 이종격투기의 인기와 함께 엮어낸 ‘쎈놈’, 좀비 장르물의 법칙을 학교라는 공간에 이식한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다양한 장르와 세계관이 포털 웹툰에 모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면에서는 불가능한 연출의 시작

더욱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환경을 통해 지면에서 불가능했던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현재 ‘다이어터’를 연재 중인 캐러멜은 데뷔작 ‘남아돌아’에서 여주인공 희나가 콘택트렌즈를 빼고 푸른 눈의 혼혈임을 밝히는 장면이 웹툰이기에 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색상의 자유로움만이 아니다. 초기에는 만화가가 극복해야 할 걸림돌에 불과했던 상하 스크롤 방식은 이제 웹툰만의 강점으로 발전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출 방식을 낳았다. 1세대인 강도하와 양영순이 상하 스크롤에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컷을 이어붙였다면, 대자보 만화를 기반으로 하던 강풀은 대자보 특유의 유연한 연출을 위아래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웹툰에 적응했다.

하지만 이후 세대인 하일권은 상하 스크롤을 ‘삼봉이발소’나 ‘3단합체 김창남’ ‘두근두근두근거려’ 등을 통해 스크롤을 내리면 배경 색깔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거나 두 인물의 감정적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시각화하는 기법으로 사용했다. 조석은 웹툰 연재 이전에도 개그 만화를 그릴 때 컷과 컷 사이의 간극을 벌려 반전 효과가 커지는 방식을 상상한 적이 있다고 밝혔는데, 이러한 상상은 상하 스크롤 방식을 통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됐다. 지면과 다른 연출이 아닌, 지면에선 불가능한 연출이 시작된 것이다.

게임 회사 출신인 호랑은 더 멀리 나아간다. 지난해 여름 납량특집으로 기획한 ‘옥수역 귀신’ ‘봉천동 귀신’에서 그는 원하는 컷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플래시와 음향효과로 독자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는 영화적 연출로 볼 수도 있지만, 각각의 독자가 저마다의 의식 속도로 스크롤을 내리다 깜짝 놀라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와는 또 다르다. 요컨대 이제는 오로지 웹툰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과 스토리가 나온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러한 발달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진다. 최근 공개된 납량특집물 ‘귀신촬영’의 경우, 아예 상하 스크롤 자체를 극복하며 작가가 상상력을 펼칠 또 다른 방식의 연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쯤 되면 새로운 대중예술 장르의 탄생이라고 봐도 손색없다.

‘미끼상품 신세’ 벗어날 비책은?

하지만 수많은 누리꾼이 TV연속극을 보듯 연재 날짜를 기다리며 작품을 본다고 해서,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플랫폼에 새로운 창작력을 선사하는 원천으로 주목받는다고 해서 이 장르의 미래가 장밋빛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장르만의 독자적 수익모델이 아직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현재의 웹툰은 작가 개개인의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아닌 포털에 철저히 기댄 구조다. 포털에서 연재에 대해 충분히 보상해주는 것은 물론 무척 중요한 문제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포털이 이 서비스를 계속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웹툰의 모든 것, 혹은 한국 만화 시장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취약한 구조가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마치 식료품을 사러 왔다 화장품까지 사고 가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처럼, 웹툰은 그 자체가 수익모델이라기보다 포털로의 유입률을 높이려는 유인책에 가깝다. 다시 말해 수익성에 대한 포털의 판단에 따라 웹툰의 미래는 얼마든지 불확실해질 수 있는 것이다. 대여점의 등장과 함께 몰락한 출판 만화의 선례에서 보았듯, 만화를 사서 보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어떤 수익모델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참신했던 콘텐츠 경쟁력 역시 마냥 지금과 같으리라고 예상할 수 없다. 웹툰 시장이 성장하고 독자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몇몇 웹툰을 청소년 유해 매체로 지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검열에 해당하는 이러한 조치는 실제로 웹툰에 묘사된 폭력이 그대로 독자에게 학습되는지에 대한 논의 없이 진행됐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19금 제한을 걸었던 작품에까지 날을 세운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그간 포털의 영향력에 비례해 발전해오던 웹툰 시장은 이제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할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 고민은 작가만 발버둥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매일같이 ‘마음의 소리’와 ‘이말년씨리즈’를 보며 웃고 싶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