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2/01/09/201201090500021_1.jpg)
먼저 강을 제대로 건너는 일부터 시작해
이토록 거대한 이정표를 본 적이 없지
입이 벌어졌고 오누이는
아직 훈련이 덜 된 것 같다
영어 학원에 다녀야겠어, 동생은 부드러운 사투리로
말했고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는 어투
오누이는 손이 닿지 않는 등의 복판을
손가락을 굽히고 긁는다 더듬이가 돋고
손과 발이 구분 없이 움직이고 넋 놓아
있는 순간 지구의 생태는 이미 바뀌어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몇 번이고
주말의 리모컨처럼 돌고 있다
머리 가슴 배
머리 가슴 배
머리 가슴 배
셋으로는 부족해
오누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강을 가로지르는 구부러진 다리를 따라
사람이 되기로 한다 이정표를 바로 본다
볼 때마다 새로운
반짝이는 저 보폭
이 강을 제대로 건널 수 있을까
당신은 훌륭한 것 같다
성실하게 훈련받은 티가 난다
오누이는 영어를 배우러 가고
작은 차를 팔아 버리고
서로의 등에서 더듬이를 뽑아내며 다리를 건너며
다짐해
다음에는 무엇보다
지구에서 태어나지 말자
― 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민음사, 2011)에서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소읍에서 “오누이”가 상경한다. 오누이가 아니라 형제자매라도 상관없다. 진눈깨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오후, 오누이는 서울에 도착한다.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들고. 지하철을 빽빽이 메운 사람을 보니 덩달아 바빠진다. 마치 자신들도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꾼이 된 것 같다. 길을 물어물어 앞으로 살 집을 겨우겨우 찾아간다. 서울이 이렇게 큰 도시인 줄은, 이런 대도시에도 달동네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저녁, 오누이는 사이좋게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을 다 먹고 자리에 누우니 기분이 요상하다. 배는 부른데 배 속은 헛헛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만 하다. 오누이는 머리를 맞대고 먹고살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일자리는 “손이 닿지 않는 등의 복판”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등이라도 긁어줄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오누이는 얼굴을 마주 보고 씩 웃는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오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구역질을 한다. 때마침 연탄불이 꺼진다. 일분일초를 견디려면, 이 대도시에서는 돈이 필요하다. 절실하다.
다음 날부터 오누이는 본격적으로 생존 “훈련”을 한다. 스스로에게 모질고 혹독해진다. 하루에 몇 시간씩 “사투리” 고치는 연습을 하고, 어떻게든 ‘표준’이 되려고 아득바득 애쓴다. 이 땅에서 “사람”이 되려면 스펙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매일매일 “주말의 리모컨”이 돼 아침에는 집에서 학원으로, 점심에는 학원에서 일터로, 밤에는 일터에서 집으로 간다. 늦은 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자문하기도 한다. “이 강을 제대로 건널 수 있을까.” 걱정의 끝은 강의 끝처럼 쉬 보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가슴에 격랑이 인다.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2/01/09/201201090500021_2.jpg)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