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T의 시원한 화이트 컬러의 여름용 양가죽 코트입니다. 디자이너 오서형 씨는 최대한 여름 분위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올여름에는 삼복더위에도 가죽코트와
양력이 각종 기념일까지 하루하루를 지켜가는, 시간의 냉혈한 감시자라면-올해는 삼일절 현충일 광복절 다 토요일인데, 한 칸씩만 물러주면 얼마나 좋을까-음력은 엄마 같아요. 어느 더운 날에 문득, 오늘이 초복이라서 그래, 라고 저를 달래주는 식이죠. 양력이 ‘머리’를 위한 스케줄표라면 음력은 자연과 나의 ‘모드’를 결정합니다.
음력은 물론 농사에서 발전했지만, 도시 생활에서도 몸과 마음을 위해 할 일들을 지시해요. 즉,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기가 막히게 정확히 알려주는 건 양력이 아니라 24개의 ‘시즌’을 가진 음력이죠. 예를 들어 ‘입동’에 모피 코트와 부츠를 개시하면 딱이고요, ‘소한’에 맞춰 모자를 쓰기 시작하면 내가 봐도 어색하지 않아요.
신문에서 ‘내일은 춘분’ 혹은 ‘추분’이라는 기사를 보면, 그 주 휴일에 옷장 정리를 하세요. 춘분엔 겨울옷을 세탁소에 보내고 추분엔 가죽 코트를 꺼내서 걸어둔 뒤 추운 겨울밤을 기다리는 거죠. 팔짱을 끼고 옷장을 보는 모습은 뿌듯하게 황태덕장을 둘러보는 어부와도 닮았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렇게 절기를 따르는 ‘패션사시사’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이미 2000년을 전후해 각 패션브랜드에서는 한겨울에 여름옷을 파는 ‘크루즈룩’을 내놓아 컬렉션을 ‘봄여름(SS)’ ‘가을겨울(FW)’로 이분화하는 관행을 무너뜨렸어요. 이는 여행 인구의 증가라는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지루한 겨울 중간에 화사한 신상으로 매출도 올리는 좋은 아이디어였죠.
그래도 여기까지는 ‘경칩에서 백로까지는 덥고, 상강에서 대한까지는 춥다’는 자연의 계절 변화를 전제로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패션 디자이너들은 온열대의 경계를 없앤 지구 온난화와 국경 없는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어요. ‘패션도 평평’해졌달까요. 세계화로 소비의 취향이 지역적 차이보다 경제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도 뚜렷해졌고요.
전에 사람들은 겨울에 털옷을 입고 여름에 짧은 치마를 입었지만, 요즘 럭셔리 패션브랜드의 고객들은 사막의 두바이에서부터 추운 러시아와 지구 반대편의 호주에 걸쳐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부자들입니다. 그러니 유럽이 겨울이라고 두꺼운 털옷만 선보일 수도 없고, 여름이라고 얇은 소재만 쓸 이유가 없는 거죠.
음력을 무색하게 한 지구 온난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어요. 디젤 같은 브랜드는 이미 야자수에 둘러싸인 에펠탑 사진을 광고에 사용했는데, 정말 오싹하더라고요. 지구가 점점 더워지면 헐벗은 디자인에 성긴 소재로 ‘봄봄’ ‘여름여름’ 컬렉션만 선보일 것 같은데, 실제로는 겨울에만 보던 가죽, 모피, 호피무늬 등을 여름옷에 사용하는 식으로 계절을 파괴한 ‘시즌리스’ 콘셉트의 옷들이 인기랍니다.
가죽이나 모피는 소재의 원초적 매력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인 데다(동물보호주의자 디자이너들이 인조가죽 개발에 골몰하는 이유),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장점도 있거든요. 큰 폭으로 줄어든 겨울철 가죽과 모피 매출을 봄여름에 만회하겠다는 전략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충분히 가능하죠.
올해의 경우, 여름에 신는 ‘서머 부츠’가 완전 떴고요, 펜디는 잠자리 날개처럼 반투명한 천에 모피를 민들레 홀씨처럼 얇게 잘라붙여 무늬를 만든 스커트를 선보여 극찬을 받았죠. 구찌, 랄프로렌도 여름용 가죽 재킷을 내놓았고요. 한국의 디자이너들도 예외는 아니랍니다. TST의 오서형 디자이너는 “여름용 가죽은 두께를 최소화해야 하는 만큼 최상급 양가죽을 많이 사용하고, 시접도 없애는 까다로운 재봉이 필요하다. 그만큼 아주 특별한 여름옷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얇은 여름 가죽이라도 면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것보단 덥겠죠. 스타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씨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 다들 몸은 죽도록 힘들어.” 그러니 어느 복날 가죽코트에 부츠 신고 걸어가는 저를 보시거든, 제발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