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는 흑인 남성 동성애자의 성장기를 다룬 ‘퀴어 영화’다. 일부 관객으로부터는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성적 소수자의 사랑 이야기다. 게다가 남자의 사회적 조건은 계급(최하층), 인종(흑인), 주거지역(흑인 집단 거주지) 등 전부 불리한 쪽에 속한다. 일반 영화 주인공으로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조건인 셈이다. 그런데 ‘문라이트’를 통해 이 남자는 관객의 지지와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성적 소수자로서의 특별함(퀴어)보다 사랑에 대한 상처와 열망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어서일 테다.
소년은 몸집이 매우 작아 별명이 ‘리틀’이다. 학교에선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선 마약중독자 모친에게 거의 방기되다시피 한다. 그가 사는 곳은 흑인만 밀집한 미국 마이애미 시 ‘리버티시티’. 영화 첫 장면부터 흑인들이 대낮에 길거리에서 마약을 거래하고 있다. 이곳 아이들이 뛰놀 때는 모차르트의 종교음악(‘구도자의 엄숙한 저녁기도’)이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들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을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년이 ‘마초’처럼 성장하는 게 지배적인 이곳에서 주인공은 남다른 성 정체성을 갖는다.
퀴어 영화가 관객 다수로부터 지지를 받은 계기는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백인 남성 카우보이 사이의 사랑이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빼어난 자연 풍광과 배우들의 연기가 한몫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보수적이라고 소문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백인 여성 사이의 사랑을 다룬 ‘캐롤’(2015)은 관객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음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아마 주인공들이 여성이란 조건이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브로크백 마운틴’이 해소한 것으로 보이던 퀴어에 대한 일부의 거부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특히 퀴어 주체가 여성 혹은 유색인인 경우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문라이트’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는 퀴어 영화 특유의 반제도적 성격이 대단히 연성화돼 있다. 주인공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카우보이처럼 제도권에서 스스로를 유배하지 않고, ‘캐롤’의 여성들처럼 가족 제도의 피해자가 되지도 않는다. 퀴어 영화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보편적인 제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관객은 제도의 허점을 성찰한다.
‘문라이트’의 두 흑인 남성은 다른 이성애자들처럼 애틋한 사랑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 아는 바다. 하지만 퀴어이기 때문에 희생하는, 혹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조건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직은 ‘흑인 남성’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전면에 묘사해낸 것, 그러면서도 여러 관객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한 것까지에 의미를 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