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이 인구통계(demographics)를 이용한 전통적인 여론조사에 의존한 반면, 도널드 트럼프는 페이스북의 ‘좋아요’ 같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심리측정(psychometrics) 기법을 이용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대선) 결과는 ‘샤이 트럼프’(숨은 트럼프 지지층)가 대거 드러나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미국 기술전문채널 마더보드(motherboard.vice.com)에 따르면 트럼프는 거의 모든 메시지를 데이터를 기반으로 구성했다. 메시지는 수신자(유권자)의 심리에 최대한 맞출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트럼프는 주류 매체인 TV를 활용하기보다 소셜미디어나 디지털 TV를 통해 개인 맞춤형 메시지로 공략해 ‘샤이 트럼프’를 이끌어냈다. 반면 클린턴은 인구통계상의 추정을 기반으로 지지율이 앞서고 있다고 확신에 차 있었다.
대선 전날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클린턴 지지율은 트럼프보다 3~5%p 앞섰다. 전체 538명인 선거인단 확보 전망도 클린턴은 270명 내외, 트럼프는 200명을 넘지 못했다. 개표 결과 트럼프는 선거인단 306명을 확보했지만 클린턴은 232명에 그쳤다. 인구통계에만 의존한 미국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기관들은 ‘샤이 트럼프’를 놓치면서 최악의 대선 오보를 냈다.
전화면접조사, 침묵의 나선 작동
“여론 형성 과정은 한 방향으로 쏠리는 나선 모양과 같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주류에 속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침묵의 나선을 만든다.”
‘침묵의 나선 이론(The spiral of silence theory)’은 독일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뇔레 노이만이 제시한 것이다. 다수 여론이 형성됐을 때 소수 의견은 더욱 침묵하게 된다는 침묵의 나선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탄핵정국 이후 탄핵 찬성 여론은 70~80%에 달한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지지층, 이념성향상 보수층, 범여권 대선주자 지지층은 여론조사에서 답변을 거부하거나 유보한다. 특히 면접원이 육성으로 전화를 걸어 질문하는 유·무선 전화면접 여론조사의 경우 침묵의 나선이 작동된다. 이에 비해 녹음된 기계음으로 실시하는 유·무선 ARS(자동응답시스템) 여론조사는 좀 더 솔직한 의사표현이 가능하다. 일반 전화기 또는 휴대전화의 숫자 버튼만 누르면 되기 때문에 의사표현을 거부하거나 유보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박 대통령 탄핵안의 인용, 기각 여론은 조사 방법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2월 1일 100% 유선 ARS로 진행된 TBC-매일신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경북에서 탄핵 인용은 48.8%, 기각은 47.0%였다. 1월 2일 무선 ARS 100%로 이뤄진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경북에서 탄핵 인용은 55.0%, 기각은 40.3%였다. 1월 2일 유·무선 ARS+유·무선 전화면접+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진행된 전국지방신문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경북의 탄핵 인용은 62.0%, 기각은 29.0%로 나타났다. 1월 2일 유·무선 전화면접 100%로 이뤄진 세계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대구·경북의 탄핵 인용이 64.4%, 기각이 25.9%였다(표1 참조·이하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면접원이 직접 전화를 걸어 육성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할 경우 탄핵 인용 비율이 높지만, 100% 유선 ARS로 실시한 조사에선 탄핵 인용 비율과 기각이 백중세를 이루고 있다. 즉 유·무선 전화면접일수록 침묵의 나선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반면 유선 ARS 100%로 실시할 경우 자신의 의사를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한다. 결국 유선 ARS>무선 ARS>혼합>유·무선 전화면접 순으로 회피 혹은 유보 없이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잠재적 범여권 대선주자 지지율
주요 여론조사에서 탄핵 기각은 15~20% 남짓이다. 범여권 대선주자 지지율도 15~20%에서 움직인다. 정확한 일치다. 15~20%는 수면 위로 드러난 보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구·경북에서 실제 탄핵 기각 여론은 전화면접 여론조사보다 거의 2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는 ‘샤이 보수’가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샤이 보수’를 감안하면 탄핵 기각 여론, 잠재적인 범여권 대선주자 지지율은 여론조사의 2배인 30~40%로 추정된다.
탄핵정국을 전후로 국민 이념지형의 변화가 많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탄핵정국 이전인 지난해 8월과 올해 2월 보수와 중도 비중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진보 비중은 18.9%에서 26.5%로 크게 늘어났고, ‘잘 모름’은 16.9%에서 8.9%로 급감했다. 대선주자 지지율에서는 지난해 8월 여권 40.1%, 야권 44.9%에서 올해 2월에는 각각 19.6%, 76.1%로 급변했다. 야권 지지가 급증한 이유는 보수층에서 야권 지지가 51.3%로 증가한 데다, 중도층에서도 79.1%가 야권 대선주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표2 참조).
그러나 이처럼 인구통계를 중심으로 발표되는 최근 여론조사에는 여러 함정이 놓여 있다. 박 대통령 지지층, 여권 대선주자 지지층, 보수층은 여론조사 응답을 회피하거나 자기 의사와 다르게 응답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박 대통령 반대층, 야권 대선주자 지지층, 진보층은 의사표현이 매우 활발하다. 세대별, 지역별 응답률 차이도 매우 크다. 20~40세대는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데 비해 50대 이상은 응답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야당 강세지역에서는 응답률이 높고 여당 강세지역에서는 응답률이 낮은 경우도 많다.
2월 4주 차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보수와 중도, 진보층에서 급증한 야권 대선주자 지지율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하다. 만약 헌법재판소(헌재)가 탄핵안을 인용한 후 민심이 안정을 찾고 지난해 8월 4주 차 여론조사의 이념성향별 여야 지지율 비중으로 회귀하면 어떻게 될까. 이념성향 구분은 올해 2월 조사를 기준으로 하고, 지난해 8월 조사의 대선주자 지지율 비중을 대입해보자. 이 경우 여권 대선주자 지지율이 현재 여론조사 결과의 2배 수준인 40.6%에 달할 수 있다. 즉 보수 26.1×여권 지지율 65.0÷100≑17.0%, 중도 38.5×34.7÷100≑13.4%, 진보 26.5×24.9÷100≑6.6%, 잘 모름 8.9×42.2÷100≑3.6%로 이를 모두 더하면 40.6%가 나온다. 물론 이렇게 해도 야권 대선주자 지지율은 48.8%로 여전히 앞서지만 헌재의 탄핵심판 이후 침묵할 필요가 없는 시기가 되면 ‘샤이 보수’는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