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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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새 대타 지휘자 뚝딱!

공연기획자들 막전막후의 ‘마술사’ … 수준 높은 해외 공연 유치 문화발전 견인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4-01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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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룻밤 새 대타 지휘자 뚝딱!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는 2월17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애프터 슈베르트’ 연주회 무대에 올라 슈베르트의 명곡들을 연주했다.

    ”이제 한국이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이곳에서 연주하고 싶습니다.”

    2월17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한 바이올린의 거장 기돈 크레머는 2001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서울 무대에 선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크레머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공연계는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이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풍성해졌다.

    특히 올해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한 해이자 통영 국제음악제가 시즌제로 출발하는 첫 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등 최정상급 교향악단과 세계적 연주자들의 내한이 잇따르고 있다. ‘맘마미아’처럼 미국과 유럽에서 돌풍을 일으킨 뮤지컬이 동시간대에 서울 무대에서 공연 중이기도 하다.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우리 공연예술계를 이끌고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2월17일),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3월17일),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3월19, 20일) 등 정상급 연주자들의 잇따른 공연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는 예술의 전당 공연기획팀 고희경 팀장(42)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 오는 아티스트들이 들러가는 나라 정도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시아 투어를 계획하는 연주자라면 누구나 필수 코스로 고려하는 무대”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공연 수준이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발전 뒤에는 세계 정상급 공연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해온 공연 기획자들의 공이 숨어 있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독특하고 실험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곳으로 유명한 ‘LG아트센터’ 공연기획팀의 이현정 팀장(34)은 1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낸다.



    “우리 관객들에게 동시간대에 펼쳐지는 최고 수준의 공연을 소개하려면 바로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공연이 뭔지 아는 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연주·뮤지컬 시차 없이 공연 중

    하룻밤 새 대타 지휘자 뚝딱!

    예술의 전당 공연기획팀 고희경 팀장.

    한국에 있을 때도 매일 인터넷을 뒤지고 공연리뷰 잡지를 확인하며 ‘지금’ ‘세계 곳곳에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공연을 빠짐없이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다. LG아트센터의 앞서가는 감각을 널리 알린 ‘단테의 신곡’이나 ‘스노우쇼’ 등 화제작은 이 과정을 통해 얻어낸 수확이다.

    한국 관객들이 선호할 만한 아티스트를 찾고, 이들을 섭외했다 해서 공연기획자의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무사히 막이 내려질 때까지 이들의 임무는 계속된다.

    고희경 팀장은 2001년 10월24일 벌어진 사건을 잊지 못한다. 당시 예술의 전당에서는 그 해 최고의 빅 카드였던 ‘쿠르트 마주어·장영주·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쿠르트 마주어가 장영주, 런던필과 함께 서는 무대인 만큼 티켓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고, 고팀장은 만족스런 마음으로 연주를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한쪽 팔만 간신히 올리며 지휘하는 마주어가 좀 어색하다 싶었을 때, 한 직원이 마주어의 부인이 울고 있다며 고팀장을 불렀다. 70이 넘은 고령에 당뇨를 앓고 있던 마주어는 당시 ‘절대 안정’을 요구하는 의료진의 권고를 뿌리치고 한국행을 강행했던 상황. 부인은 “그의 뒷모습이 심상치 않다”며 “저대로 두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울부짖은 것이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공연 시간을 버틴 마주어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 그대로 쓰러졌고, 의료진은 ‘더 이상의 공연은 무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틀 예정으로 기획된 이 공연의 다음날 연주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책임은 고스란히 고팀장에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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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아트센터 공연기획팀 이현정 팀장(왼쪽)과 공연 직전 주연 배우가 다리를 다쳤던 ‘단테의 신곡 3부작’.

    “시간은 이미 자정을 향하고 있었어요. 티켓을 전액 환불해주고 다음날 공연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강행해야 하느냐 기로에 선 순간이었죠.”

    그리고 다음날, ‘쿠르트 마주어·장영주·런던 필하모닉’공연은 관객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끝났다. 막이 오를 때까지 기자들조차 알지 못했지만, 어느새 공연 이름이 ‘유리 테미르카노프·장영주·런던 필하모닉’으로 바뀐 상태였다. 고팀장이 단 하루 만에 ‘뛰어난 대타’ 유리 테미르카노프를 찾아낸 것이다. 당시 그가 원한 것은 마주어 정도의 실력과 명성을 지닌 마에스트로 가운데 하루 만에 서울에 올 수 있는 인물. 때마침 테미르카노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을 이끌고 일본 투어 중이었다.

    “마주어와 친분이 있던 테미르카노프는 흔쾌히 대리 지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그와 연락이 닿자마자 저는 퇴근한 영사의 자택을 찾아가 비자를 만들었고, 테미르카노프는 다음날 낮 12시30분 한국에 도착했지요. 그러고는 연주가 시작되는 오후 7시30분까지 단원들과 곡들을 연습했어요. 그렇게 촉박한 시간이었는데도 그의 지휘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대가’란 이런 것이구나, 그날 실감했지요.”

    이때의 인연으로 마주어는 건강을 회복한 뒤 2002년 7월 뉴욕필과 내한해 이틀간의 연주를 선사했고, 테미르카노프 역시 2003년 10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을 이끌고 내한 공연을 펼쳤다. 두 마에스트로에게 한국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현정 팀장에게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그의 기억은 2002년 11월, ‘단테의 신곡 3부작’을 공연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7m 높이의 철벽 위에서 3만2000리터의 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충격적 무대, 지옥 연옥 천국을 생생히 묘사한 연출로 단연 그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 ‘신곡 3부작’은 갓 개관한 LG아트센터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다. 하지만 당시 이팀장은 충격적 무대보다 더 충격적인 무대 뒤 상황 때문에 머리가 쭈뼛거렸다고 한다. ‘지옥’편의 최종 리허설에서 단테역을 맡은 주연 배우가 무릎을 다쳐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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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

    “한 달 전부터 전 좌석이 매진됐을 만큼 기대가 높은 공연이었어요. 그런데 ‘단테’없는 신곡은 불가능하잖아요.”

    그때 순간적으로 연출가의 머리에 떠오른 컨셉트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였다. 마치 단테의 꿈속에서 펼쳐지는 상황인 것처럼 주연 배우는 무대에 누운 채 대사를 읊었다. 함께 오랜 시간 훈련해 주역의 몸놀림까지 모두 알고 있는 다른 배우가 그의 육체를 대신했다.

    “다행히 공연은 대성공이었어요. 주연 배우가 다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들도 많았고, 평론가들은 영육의 분리가 오히려 더 창의적이라는 의견을 내놓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공연기획자들은 화려한 무대 위 모습만을 꿈꾸며 공연기획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조언한다. 끝없는 위기를 마술처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그 순간의 긴장조차 사랑하는 사람만이 공연기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준비한 공연에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 그리고 해외 아티스트들이 한국의 공연문화에 감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관객 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요. 젊고 활기차고 열정적이죠. 한국을 한 번 찾은 연주자라면 누구나 이 ‘굿 오디언스’에게 반해버립니다. 관객과 연주자가 서로 감동을 주고받는 공연장 안에 서 있는 것은 공연기획자로 살아가며 느끼는 최고의 행복이죠.”

    고희경 팀장은 좋은 공연장이 점점 늘어나고, 관객들의 수준 또한 높아지고 있는 한국 문화계가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과정에 한몫을 담당하고 싶은 것이 공연기획자들의 유일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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