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가끔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어쩌면 이 맛 때문에 영화평론을 업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본 무수한 영화들 가운데 이런 기쁨을 가져다준 영화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어떤 영화를 보고 감동이나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사실 이런 종류의 느낌은 주류 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비주류 영화를 통해서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뷰티풀 마인드’ 같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거나 ‘식스 센스’ 같은 영화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지만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발견의 기쁨은 남들이 다 시큰둥해하거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제쳐놓은 비주류 영화들을 마주할 때에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영화 체험이다.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Road Movie)’가 바로 그런 종류의 영화다. 화제작도 많고 흥행작도 많았던 올해 한국영화판에서 이 영화는 그런 외적 요인을 떠나서 음미할 만한 대목이 많은 아주 독특한 영화라 하겠다.
‘로드무비’는 일단 제목 그대로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는 영화다. 길 위에서 펼쳐지는 영화라는 말이다. 그래서 일단 닫혀 있는 세트를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그런데 그 길은 단순히 물리적인 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방황과 좌절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이 ‘로드무비’지만 영화 속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한 멋있는 길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거니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를 로드무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길 자체가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배경으로만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로드무비’는 남다르다. 길의 영화이기는 하되 형극(荊棘)의 길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길은 인간의 인생 여정을 환유적으로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특수한 사람들의 정체성 문제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관상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는 또 하나의 ‘퀴어(queer)무비’지만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이나 특이하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로드무비에 수반되게 마련인 버디무비의 공식을 뒤엎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버디무비라 하면 보통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남자 두 사람이 중심에 있고 그중 한 남자의 애인인 여성이 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는 그 단적인 예다. 물론 이때 여자는 두 남자가 은밀한 사랑을 나눌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로드무비’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일단 등장인물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때 잘 나가는 산악인이었던 대식(황정민)은 아이까지 둔 아버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다 홈리스로 전락한다. 또 다른 한 남자는 주가폭락으로 폭삭 망한 펀드매니저 석원(정찬)이다. 아내마저 떠나버린 그에게 대식은 보호자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무전여행을 나섰다가 다방에서 일하는 일주(서린)를 만난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관습적인 설정이라 하겠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대식에게 반해 죽자고 쫓아다니는 일주는 그가 석원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석원을 동거 상대(볼모)로 삼으면서까지 대식을 잡아두려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인간은 참으로 불가해한 존재다. 성적 정체성에 관한 한 특히 그렇다. 대개가 그렇듯이 동성애에 대한 모종의 편견을 갖고 있었던 나는 어느 날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득도의 경지란 얘긴 아니다. 이성애라 하여 모든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동성애라 하여 모든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양자의 구분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가슴 에는 여정에서 일반 사람들과 특수한 이들의 고통의 질이 다를 턱이 있겠는가? ‘로드무비’는 그런 조그만 깨달음을 영화적으로 질박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해준 영화였다.
이는 어떤 영화를 보고 감동이나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사실 이런 종류의 느낌은 주류 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비주류 영화를 통해서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뷰티풀 마인드’ 같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거나 ‘식스 센스’ 같은 영화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지만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발견의 기쁨은 남들이 다 시큰둥해하거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제쳐놓은 비주류 영화들을 마주할 때에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영화 체험이다.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Road Movie)’가 바로 그런 종류의 영화다. 화제작도 많고 흥행작도 많았던 올해 한국영화판에서 이 영화는 그런 외적 요인을 떠나서 음미할 만한 대목이 많은 아주 독특한 영화라 하겠다.
‘로드무비’는 일단 제목 그대로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는 영화다. 길 위에서 펼쳐지는 영화라는 말이다. 그래서 일단 닫혀 있는 세트를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그런데 그 길은 단순히 물리적인 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방황과 좌절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이 ‘로드무비’지만 영화 속에서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한 멋있는 길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거니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를 로드무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길 자체가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배경으로만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로드무비’는 남다르다. 길의 영화이기는 하되 형극(荊棘)의 길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길은 인간의 인생 여정을 환유적으로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특수한 사람들의 정체성 문제를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관상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는 또 하나의 ‘퀴어(queer)무비’지만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척이나 특이하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로드무비에 수반되게 마련인 버디무비의 공식을 뒤엎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버디무비라 하면 보통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남자 두 사람이 중심에 있고 그중 한 남자의 애인인 여성이 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는 그 단적인 예다. 물론 이때 여자는 두 남자가 은밀한 사랑을 나눌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로드무비’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일단 등장인물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때 잘 나가는 산악인이었던 대식(황정민)은 아이까지 둔 아버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다 홈리스로 전락한다. 또 다른 한 남자는 주가폭락으로 폭삭 망한 펀드매니저 석원(정찬)이다. 아내마저 떠나버린 그에게 대식은 보호자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무전여행을 나섰다가 다방에서 일하는 일주(서린)를 만난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관습적인 설정이라 하겠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대식에게 반해 죽자고 쫓아다니는 일주는 그가 석원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석원을 동거 상대(볼모)로 삼으면서까지 대식을 잡아두려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인간은 참으로 불가해한 존재다. 성적 정체성에 관한 한 특히 그렇다. 대개가 그렇듯이 동성애에 대한 모종의 편견을 갖고 있었던 나는 어느 날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득도의 경지란 얘긴 아니다. 이성애라 하여 모든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동성애라 하여 모든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양자의 구분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가슴 에는 여정에서 일반 사람들과 특수한 이들의 고통의 질이 다를 턱이 있겠는가? ‘로드무비’는 그런 조그만 깨달음을 영화적으로 질박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해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