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만 해도 인형은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1, 2년 사이 ‘인형산업’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인형들이 보급되고 있다. 인터넷에 개설된 인형 관련 사이트도 100여개에 육박한다.
- 아이들을 위한 인형부터 어른을 위한 인형, 전통인형, 테디베어 등 인형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 인형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루에 열 개씩 인형을 만들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작가.
- 20년 동안 자신이 만든 인형과 놀았다는 작가…. 그들 앞에서 ‘인형을 왜 만드시나요?’라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한결같이 자신이 만든 인형과 닮아 있는 얼굴. 그들은 자신의 분신을 하나씩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예쁜 꿈을 꾸고 있었다.
“인형의 제작과정은 조각과 똑같아요. 일종의 헝겊조각이랄까요. 몸통은 헝겊에 솜을 넣어 입체재단으로 만들고 손, 얼굴은 흙으로 구워 만들죠. 의상 역시 손바느질로 만들고요. 머리는 인조가발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인 인형 제작법이 없다. ‘흑운’의 인형들은 모두 현씨가 독창적으로 제작한 것들이다. 서울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현씨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인형을 좋아했다. 10년 정도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럽 인형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마침내 2년 전부터 자신의 미술 실력과 상상력을 총동원해 손수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6월에 신사동에 인형가게 ‘흑운’을 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전통 인형들이 있습니다. 저는 서양인의 얼굴에 한복만 입은 인형이 아닌, 진짜 우리 인형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증도 철저히 하고 인형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씁니다.”
30cm 정도 크기의 인형 하나 가격은 보통 32만원에서 38만원 선. 비싸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모든 작업이 손으로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비싸다고 할 수도 없다. 손님 중에는 예상외로 남자들이 적지 않다고.
“인형을 만드는 것은 힘들다기보다 즐거운 작업이에요. 하지만 전통 공예의 맥이 워낙 소멸되었다 보니 부자재를 구하기 힘든 때가 많습니다. 인형이 제대로 된 공예품으로 대접받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지요.”
가을에 전시회를 열 계획인 현씨는 인형 박물관을 열고 한국 최초의 인형장이 되고픈 꿈을 가지고 있다. 최민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그의 남편이다.
군자동에 있는 강소희씨(46)의 작업실에는 줄잡아 200여점이 넘는 종이인형들이 자리잡고 있다. 인형작가 강씨가 지난 23년간 만들어온 인형들이다. 강씨는 절대 자신의 인형을 팔지 않는다. 모두들 너무나 소중한 분신들이기 때문이다.
“20년간 취미로 인형을 만들다가 3년 전, 인사동에 작업실을 내면서 대외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인형을 판매하자는 제의를 많이 받았죠. 하지만 고민 끝에 저는 그냥 가난한 인형작가로 남기로 했어요.”
강씨는 하나 있는 아들에게 한 번도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지 않았을 정도로 살뜰한 주부였다. 여러 가지 인형 중 종이 인형을 만들기로 한 것도 1만원어치의 재료를 사면 30~40개의 인형이 너끈히 나올 만큼 재료값이 쌌기 때문이라고. 그런 강씨가 어떻게 작업실을 내고 인형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20년간 만든 인형을 보여주고픈 마음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사실 집안에만 머물러 있던 제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죠.”
그가 정성들여 만든 인형들은 예상외로 큰 환영을 받았다. 강씨는 ‘21세기 위원회’ ‘전파견문록’ 등 방송용 소품을 만들었고 ‘강소희 종이인형’이라는 인형 제작 서적도 냈다. 현재는 가을에 열리는 한·일 작가전에 출품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축구예요. 그래서 저는 동네 축구와 신라시대 화랑들이 하던 ‘축국’을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해요. 닥종이는 낡은 듯 바랜 듯한 느낌이 매력이죠. 또 닥종이는 종이를 꼬아 뜨개질을 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기도 해요.”
최근 닥종이의 매력에 빠져 있는 강씨가 즐겨 만드는 주제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아들이나 리어카를 끄는 모자처럼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60년대의 풍경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 쓰던 리어카 등을 재현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
“제가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가면서 보았던 풍경들이죠. 과거가 그리워서 자꾸 이 같은 모습을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동물과 사람, 예를 들면 외양간에서 소와 아이가 함께 있는 장면 등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정희영씨(34)는 네티즌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인형작가다. 그가 만든 인형들, 긴 목과 팔다리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헝겊 인형은 어린 시절 꿈꾸던 ‘예쁜 공주님’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4년 전 첫아이를 가졌을 때 처음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하루에 12개까지 인형을 만들어본 날이 있을 정도로 인형에 푹 빠졌죠. 지금까지 만든 인형을 다 합하면 1000개가 훨씬 넘을 거예요.”
정희영씨 인형의 특징은 헝겊 인형인데도 불구하고 40~50cm의 큰 키에 긴 목과 팔다리를 가진 ‘슈퍼모델’ 형이라는 것. 오드리 헵번이나 샤론 스톤 등 영화배우나 스칼렛 오하라 등을 모델로 만든 인형도 있다. 최근에는 목과 팔다리에 전혀 이음새가 없는 몸통을 독창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는 이 모든 인형을 별다른 스케치나 아이디어 없이, 그야말로 ‘뚝딱’ 만들어내는 천생 인형작가다. 인형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30분에 불과하지만, 1000개가 넘는 인형 중 똑같은 옷을 입은 인형은 하나도 없다.
“아이디어가 떨어지면 원단 시장에 가요. 원단을 보면 ‘아, 저 천으로 이런저런 옷을 입은 인형을 만들면 되겠구나’ 하는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르거든요.”
인터넷에 개설된 정씨의 인형 사이트(www.ilovedoll.co.kr)는 개설 1년 만에 회원 수가 4000여명을 넘어섰다. 1년에 한두 번 사이트를 통해 인형을 판매하는데 30만원 정도의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판매가 시작되면 1시간이 채 안 되어 모든 인형이 동난다.
“개인적으로는 심플한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화려한 공주 인형이나 결혼하는 신부 인형을 만들어달라고 해요. 아마 인형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인가 봐요.” 그동안 만든 인형들은 내년 4월에 열릴 첫 전시에서 세상 나들이를 할 예정이다.
김복희씨(29)가 만든 인형은 여느 인형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오동통한 볼에 작은 눈과 입술, 옷 역시 인형이 으레 입을 법한 드레스 대신 평범한 티셔츠에 치마나 바지를 입었다. 치마 속으로는 속옷이 살짝 들여다보인다. ‘발도르프 인형’이라고 불리는 이 인형들은 독일의 주부들이 아이들에게 만들어주는 헝겊 인형이다.
“발도르프 인형은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면이나 모 등 천연소재로 만들어져 있어서 아이들에게 무해하다는 점. 빨거나 옷을 갈아입힐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원형붕대에 실로 동여매서 얼굴과 몸통을 만드는 독특한 제작방식이죠.”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김씨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독일에 갔다가 처음 발도르프 인형을 만났다. 기숙사의 독일인 친구가 인형을 만들고 있었던 것. 김씨는 독일어를 배울 욕심으로 친구에게 인형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했다가 수수하면서도 평범한 발도르프 인형에 매료되었다. 결국 발도르프 인형의 권위자인 선힐트 라인케스씨에게 1년 반 동안 손인형, 마리오네트 인형 등 갖가지 발도르프 인형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인형 만들기에 주력하기 위해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었지만 후회는 없다.
“겨울이 긴 독일에서는 주부들이 대부분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하나씩 갖고 있지요. 발도르프 인형도 그런 경우예요. 발도르프 인형은 플라스틱 인형에 비해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아이들에게 이 인형을 보여주면 ‘인형이 못생겼다’고 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자나깨나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평범한 생김새와 옷 때문이겠죠.”
‘발도르프 하우스’라는 김씨의 홈페이지(www.whaus.co.kr)에서는 완제품 인형은 물론 재료도 판매한다. 솜씨 좋은 엄마들은 곧잘 만드는 법을 배워 아이들에게 인형을 안겨준다고.
“흔히 ‘교육 효과가 있는 인형’이라고들 하는데 대단한 건 아니고요, 외동아이에게 발도르프 인형은 동생 역할을 할 수 있죠. 또 동생이 생겨나는 아이들에게 갓난아기 모양의 발도르프 인형을 선물해 주면 막상 아기가 태어나도 그리 놀라거나 떼를 쓰지 않는다고 해요.”
지난해 12월 한국에 온 김씨의 집에는 아직 상자에 들어 있는 인형들이 많았다. 사진 촬영을 위해 상자 속에 든 인형을 한꺼번에 바닥에 쏟았다. 그러자 김씨는 “그러면 인형이 아파요” 하며 인형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가슴에 안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