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김정호의 분신’ 혹은 ‘신산자’(新山子: 고산자 김정호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불린 이우형 선생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겨울 ‘주간동아’가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을 해도 극구 사양한 이유가 있었다. 몸에 퍼진 암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알고 그는 초췌해진 모습을 감췄다.
‘한국의 재야학자’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고지도연구가 이우형이었다. 그는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묻혀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발견했고, ‘백두대간’ 개념을 전파하는 등 역사지리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실장은 고인의 학문적 업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선생은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해볼 수 있는 연구는 다했다.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지도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고산자가 대원군 때 옥사했고 ‘대동여지도’ 판목은 모두 폐기되었다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삭제될 뻔한 김정호 부분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도록 했다.”
이우형씨를 전형적인 ‘재야학자’로 꼽는 이유는, 우선 구별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따지는 전공분야의 ‘학위’가 없다. 최종학력은 고등학교이며 한때 서울시연맹 구조대장을 지낸 산악인이었고, 잠깐이지만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으며, ‘산수’라는 등산잡지 발행인이었다. 80년대 초 채산성이라곤 전혀 없는 지도제작을 위해 설립한 ‘광우당’의 대표일 때도 있었다. 둘째로 그는 고산자 연구에 미쳤지만 애당초 이것으로 밥벌이할 생각은 없었다. 셋째, 평생 무관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 살았다.
원래 ‘재야’(在野)란 벼슬하지 않고 민간에 있다는 의미로, 재정(在廷)의 반대 개념에서 쓰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재야인사’란 특정 정당이나 의회에 속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었던 ‘재야’가 90년대 들어 학계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학문은 대학에서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미분야 개척은 아웃사이더의 몫”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벼룩의 간’까지도 왼다는 곤충학자 김정환씨(53). 그는 곤충연구를 시작한 1983년 이래 ‘한국산 나비의 역사와 일본 특산종 나비의 기원’ ‘우리 나비 백 가지’ ‘한국의 잠자리, 메뚜기 원색도감’ 등 10여권의 책과 4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개미허리왕잠자리, 병정진딧물 등 15종의 미기록 곤충을 찾아냈다. 그에게 재야학자의 역할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전공자는 지도교수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그러나 비전공자는 지도교수와 학풍에 매달릴 필요가 없으니 틀린 것은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50년 전 대학자가 잘못 분류해 놓은 것을 한 번도 검증해 보지 않고 인용만 하니 오류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또 재야에 있어야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 곤충을 연구하려면 식물을 알아야 하고, 기후학 지질학 생물학 등 그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오늘날의 대학처럼 전공이 파리, 나방, 풍뎅이 등 따로따로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식일 수밖에 없다.”
재야학자는 정통과 비정통, 주류와 비주류라는 공식에 얽매여 있는 기존 학계의 금기를 깨뜨린다. 대표적인 인물로 고인이 된 재야사학자 임종국씨(1929년생)가 있다. 그는 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년간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66년 원고지 2000장 분량의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이후 83년 ‘일제침략과 친일파’, 84년 ‘밤의 일제침략사’, 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87년 ‘친일논설선집’, 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잇따라 발표했다.
한국 현대사의 아웃사이더 11인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98년 삼인 펴냄)에서 임종국편을 집필한 정운현씨는 재야사학자란 존재를 이렇게 정리했다.
“인맥 없이는 인간 행세를 제대로 못하는 우리 학계 풍토에서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치부되거나 때로는 보수 반동 집단으로부터 급진파로 몰리기 십상인 것이 바로 재야사학자다. 어떤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는 그와 같은 부류의 재야사학자를 두고 ‘넝마주이’라고 비하했을 정도다. 헌 책방을 뒤지면서 옛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친일파 연구에 바친 일생’에서)
물론 재야학자들이 제기한 많은 학설이 합리성과 논리성 결여로 제도권의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여전히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그러나 ‘재야학자’의 삶이 세속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업적마저 과소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 거꾸로 재야라는 이름 때문에 삶 자체가 신비화되어서도 안 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 뿐이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75)는 강단학자와 재야학자라는 두 가지 명함을 갖고 있다. 최교수는 미국에서 수입된 실증주의나 구조기능주의 이론이 지배하던 1960년대 한국 사회학계에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65년), ‘한국가족연구’(66년) 등을 발표하면서 한국 고대 가족사 연구라는 토착사회학 연구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최교수는 85년 ‘한국학보’에 ‘소위 문헌고증학에 의한 삼국사기 비판의 정체’라는 논문을 게재하고 그간 한국사 연구를 주도해온 이병도, 이기백 등이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정면 비판하면서 재야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후 20년 가까이 그가 ‘재야사학자’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논문은 100편이 넘는다. 최교수는 지난 4월 ‘고대한일관계와 일본서기’를 펴낸 것으로 사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일단락지었다. 요즘 최교수의 고민은 집과 개인 연구실에 쌓인 수많은 자료를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 후학이 없는 재야학자들의 또 다른 고민을 말해준다.
지난 8월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재야사학자 임승국 선생도 최재석 교수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그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뛰어들면서 재야사학자로 불리게 된다. 그는 86년 주류학자들이 가짜라고 판정한 ‘한단고기’(桓檀古記: 혹은 환단고기)를 번역하면서 “한단고기를 근거가 불확실하다든가, 신빙성이 없다든가, 편찬자들의 학문적 업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내팽개칠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시되어야 하고,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토종쌀 ‘다마금’으로 유명한 농초(귀머거리 나무꾼) 박문기씨(54)는 상고사 분야의 재야학자로 이름이 나있지만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대신 어렸을 때 배운 한학실력으로 주경야독해 ‘맥이’ ‘대동이’(전6권) ‘본주’ ‘숟가락’ 등 역사서들을 펴냈다. 한국사의 시작은 단군시대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는 박씨는, 최근 펴낸 ‘한자는 우리글이다’에서 매우 대담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상고사의 새 발견’에서 삼한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우리 고대국가의 활동무대가 중국대륙에 걸쳐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이중재 한국상고사학연구회장, 단군은 요임금과 동일인이라든가, 신라 시조인 혁거세의 성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다는 등의 흥미로운 주장으로 눈길을 끈 김종윤씨 등의 재야사학자가 있다. 재야사학자들 대부분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이 분야 연구가 사료 부족으로 공백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태 실장은 “한 점을 지나가는 직선은 수없이 많다”는 말로 고대사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점 하나에 불과한 사료는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이런 연구풍토에 대해 강단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98년 서울대에서 고조선 연구로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고고학 자료를 편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겨울, 학술지 ‘역사비평’과 ‘한국일보’ 기고문을 통해 재야사학자를 첫째 단군사상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데 주안점을 둔 부류, 둘째 대학에 몸담지 않고 단군조선만 연구하는 부류, 셋째 대학강단에서 중국문헌 및 고고학 자료를 확대 해석하는 부류 등 세 가지로 나누기도 했다. 송교수의 지적은 오랜 세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93년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연구해 지난 8월 ‘백제금동대향로’를 펴낸 재야미술사학자 서정록씨(46)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사학으로 돌아섰다.
“재야학자들은 고립되어 있다. 혼자 자료를 보고 혼자 생각하다 보니 비판적인 지적을 받을 기회가 없어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다. 만약 학계와 교류할 수 있었다면 기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씨의 지적대로 재야학자들이 가장 갈증을 느끼는 것은 연구자료다. 그래서인지 사료 수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많다. 서지학자 이종학씨(74)가 대표적인 인물. 이순신 전문가, 독도지킴이, 사운연구소 소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종학씨도 초등학교로 학업을 마친 것이 아쉬워 책을 탐독하던 중 자료수집가가 되었다. 이우형씨가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종학씨가 광복 후 일본이 우리측에 문화재를 인수하면서 작성한 ‘대동여지도’ 목판본 인계서를 제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최근 이씨는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1909년 석굴암 전실 사진을 공개해 지난 30여년간 계속된 석굴암 논쟁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씨에 버금가는 금석서지학자가 박영돈씨(67)다. 그도 초등학교 졸업에 은행 수위로 정년퇴직한, 학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학문하는 일에 학력이나 직업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중 하나가 일연선사비의 탁본을 발견하고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 있는 비문을 복원한 것이다.
한편 한글학계에서 한국어문연구소 남영신 소장(53)의 존재는 각별하다. 서울대 법대 1학년 시절부터 우리말 갈고닦기에 관심을 두고 ‘국어운동학생회’를 결성한 것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펴낸 것이 ‘우리말 분류사전’ 이름씨편. 이듬해 풀이말편을 펴낸 데 이어 92년 꾸밈씨편을 끝으로 토박이 우리말 사전 3권을 완간했고, 그 뒤로도 두 권의 국어사전을 더 펴냈다. 이를 위해 그는 변변한 직장도 없이 34년간 재야한글학자로 남았다.
남소장은 재야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어차피 재야와 기존학계가 할 일이 따로 있고, 필요할 때는 협력하면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갈고닦는 일에는 한글학회와 국립국어연구원, 문화관광부 그리고 남소장이 이끄는 국어문화운동본부 4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21세기 벽두에 실천할 과제로 ‘국어관리법’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업연구원 기능직 공무원인 한상배씨(64)의 경우도 박사학위 없는 ‘나무박사’로 이곳 연구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정년퇴직 후에도 계속 연구원에 출퇴근하며 한국 수목학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한씨는 선친이 산림청 공무원이어서 산림청 관사에서 태어나 평생 산림청에서 직장생활을 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2000종이 넘는 희귀종 식물을 채집했고,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1만여점의 식물표본도 스승 김이만씨와 함께 복원했다. 20년 가까이 임업연구원에서 한씨와 일해온 최명섭 연구원은 “현장연구를 필요로 하는 수목학이 3D업종으로 인식돼 젊은 연구자들이 기피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식물의 자생지에 대해 한선생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며 재야 구분 없이 공동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최근 들어 반가운 것은 강단과 재야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정우 전 서강대 교수(41·철학)와 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교수(41·철학)처럼 스스로 강단을 버리고 기꺼이 재야를 택한 사람들도 있다. 이씨는 교수직을 버리면서 “교수만이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우리 사회의 잘못된 통념”이라고 했다. 이교수는 99년 일반인 대상의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강의와 연구·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재야학자라 해서 늘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400년 동안 묻혀 있던 사암침법을 부활시킨 한의사 김홍경씨가 TV 특강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고, ‘그냥 음약인’ 임동창씨는 대학에서의 전공이 서양음악인데도 우리 가락을 설파하는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주류는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고음반연구가인 노재명씨(33)처럼 험난한 재야의 길을 자처한 젊은 연구자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이름 석자보다 직함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재야학자의 입지는 여전히 좁다. 재야철학자 김용석씨(49)는 18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어디에 기고할 때마다 그냥 ‘철학자’로 소개해도 될 것을 굳이 ‘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교수’로 바꿔놓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다. 학위 받고 학교에 자리를 잡았느냐 못 잡았느냐로 재야와 강단을 구분한다면 고미숙씨(41)도 분명 재야국문학자다. 고씨는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국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라는 이름의 지식공동체를 꾸렸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연구실을 취재한 뒤 내보낸 내용은 전혀 엉뚱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많은 고등지식인들이 제도권에 진출하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식이었다. 재야학자를 불쌍한 실업자로밖에 보지 않는 일반의 편협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학문에서 정통과 비정통, 재야와 강단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실장은 “우리 사회의 최대 약점은 단선화에 있다. 그러나 앞으로 버라이어티한 사회가 될수록 재야의 입지는 더욱 넓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재야의 반대 개념이 분명치 않다는 데서 이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국어학자 남영신씨에게 재야와 제도권의 소통 가능성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학자란 끝없이 자기와 다른 이론을 찾아 나름의 이론과 관을 확립해 가는 사람이다. 학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잣대지만 그 주제에 대한 일회적 논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공을 하지 않았어도 이론을 창안하고 정리해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손해일 뿐이다.”
‘한국의 재야학자’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고지도연구가 이우형이었다. 그는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묻혀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발견했고, ‘백두대간’ 개념을 전파하는 등 역사지리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실장은 고인의 학문적 업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선생은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해볼 수 있는 연구는 다했다.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지도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고산자가 대원군 때 옥사했고 ‘대동여지도’ 판목은 모두 폐기되었다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삭제될 뻔한 김정호 부분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도록 했다.”
이우형씨를 전형적인 ‘재야학자’로 꼽는 이유는, 우선 구별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따지는 전공분야의 ‘학위’가 없다. 최종학력은 고등학교이며 한때 서울시연맹 구조대장을 지낸 산악인이었고, 잠깐이지만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으며, ‘산수’라는 등산잡지 발행인이었다. 80년대 초 채산성이라곤 전혀 없는 지도제작을 위해 설립한 ‘광우당’의 대표일 때도 있었다. 둘째로 그는 고산자 연구에 미쳤지만 애당초 이것으로 밥벌이할 생각은 없었다. 셋째, 평생 무관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 살았다.
원래 ‘재야’(在野)란 벼슬하지 않고 민간에 있다는 의미로, 재정(在廷)의 반대 개념에서 쓰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재야인사’란 특정 정당이나 의회에 속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었던 ‘재야’가 90년대 들어 학계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학문은 대학에서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미분야 개척은 아웃사이더의 몫”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벼룩의 간’까지도 왼다는 곤충학자 김정환씨(53). 그는 곤충연구를 시작한 1983년 이래 ‘한국산 나비의 역사와 일본 특산종 나비의 기원’ ‘우리 나비 백 가지’ ‘한국의 잠자리, 메뚜기 원색도감’ 등 10여권의 책과 4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개미허리왕잠자리, 병정진딧물 등 15종의 미기록 곤충을 찾아냈다. 그에게 재야학자의 역할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전공자는 지도교수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그러나 비전공자는 지도교수와 학풍에 매달릴 필요가 없으니 틀린 것은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50년 전 대학자가 잘못 분류해 놓은 것을 한 번도 검증해 보지 않고 인용만 하니 오류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또 재야에 있어야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 곤충을 연구하려면 식물을 알아야 하고, 기후학 지질학 생물학 등 그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오늘날의 대학처럼 전공이 파리, 나방, 풍뎅이 등 따로따로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식일 수밖에 없다.”
재야학자는 정통과 비정통, 주류와 비주류라는 공식에 얽매여 있는 기존 학계의 금기를 깨뜨린다. 대표적인 인물로 고인이 된 재야사학자 임종국씨(1929년생)가 있다. 그는 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년간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66년 원고지 2000장 분량의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이후 83년 ‘일제침략과 친일파’, 84년 ‘밤의 일제침략사’, 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87년 ‘친일논설선집’, 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잇따라 발표했다.
한국 현대사의 아웃사이더 11인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98년 삼인 펴냄)에서 임종국편을 집필한 정운현씨는 재야사학자란 존재를 이렇게 정리했다.
“인맥 없이는 인간 행세를 제대로 못하는 우리 학계 풍토에서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치부되거나 때로는 보수 반동 집단으로부터 급진파로 몰리기 십상인 것이 바로 재야사학자다. 어떤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는 그와 같은 부류의 재야사학자를 두고 ‘넝마주이’라고 비하했을 정도다. 헌 책방을 뒤지면서 옛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친일파 연구에 바친 일생’에서)
물론 재야학자들이 제기한 많은 학설이 합리성과 논리성 결여로 제도권의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여전히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그러나 ‘재야학자’의 삶이 세속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업적마저 과소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 거꾸로 재야라는 이름 때문에 삶 자체가 신비화되어서도 안 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 뿐이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75)는 강단학자와 재야학자라는 두 가지 명함을 갖고 있다. 최교수는 미국에서 수입된 실증주의나 구조기능주의 이론이 지배하던 1960년대 한국 사회학계에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65년), ‘한국가족연구’(66년) 등을 발표하면서 한국 고대 가족사 연구라는 토착사회학 연구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최교수는 85년 ‘한국학보’에 ‘소위 문헌고증학에 의한 삼국사기 비판의 정체’라는 논문을 게재하고 그간 한국사 연구를 주도해온 이병도, 이기백 등이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정면 비판하면서 재야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후 20년 가까이 그가 ‘재야사학자’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논문은 100편이 넘는다. 최교수는 지난 4월 ‘고대한일관계와 일본서기’를 펴낸 것으로 사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일단락지었다. 요즘 최교수의 고민은 집과 개인 연구실에 쌓인 수많은 자료를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 후학이 없는 재야학자들의 또 다른 고민을 말해준다.
지난 8월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재야사학자 임승국 선생도 최재석 교수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그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뛰어들면서 재야사학자로 불리게 된다. 그는 86년 주류학자들이 가짜라고 판정한 ‘한단고기’(桓檀古記: 혹은 환단고기)를 번역하면서 “한단고기를 근거가 불확실하다든가, 신빙성이 없다든가, 편찬자들의 학문적 업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내팽개칠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시되어야 하고,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토종쌀 ‘다마금’으로 유명한 농초(귀머거리 나무꾼) 박문기씨(54)는 상고사 분야의 재야학자로 이름이 나있지만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대신 어렸을 때 배운 한학실력으로 주경야독해 ‘맥이’ ‘대동이’(전6권) ‘본주’ ‘숟가락’ 등 역사서들을 펴냈다. 한국사의 시작은 단군시대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는 역사관을 갖고 있는 박씨는, 최근 펴낸 ‘한자는 우리글이다’에서 매우 대담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상고사의 새 발견’에서 삼한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우리 고대국가의 활동무대가 중국대륙에 걸쳐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이중재 한국상고사학연구회장, 단군은 요임금과 동일인이라든가, 신라 시조인 혁거세의 성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다는 등의 흥미로운 주장으로 눈길을 끈 김종윤씨 등의 재야사학자가 있다. 재야사학자들 대부분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이 분야 연구가 사료 부족으로 공백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태 실장은 “한 점을 지나가는 직선은 수없이 많다”는 말로 고대사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점 하나에 불과한 사료는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이런 연구풍토에 대해 강단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98년 서울대에서 고조선 연구로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고고학 자료를 편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겨울, 학술지 ‘역사비평’과 ‘한국일보’ 기고문을 통해 재야사학자를 첫째 단군사상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데 주안점을 둔 부류, 둘째 대학에 몸담지 않고 단군조선만 연구하는 부류, 셋째 대학강단에서 중국문헌 및 고고학 자료를 확대 해석하는 부류 등 세 가지로 나누기도 했다. 송교수의 지적은 오랜 세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93년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연구해 지난 8월 ‘백제금동대향로’를 펴낸 재야미술사학자 서정록씨(46)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사학으로 돌아섰다.
“재야학자들은 고립되어 있다. 혼자 자료를 보고 혼자 생각하다 보니 비판적인 지적을 받을 기회가 없어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다. 만약 학계와 교류할 수 있었다면 기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씨의 지적대로 재야학자들이 가장 갈증을 느끼는 것은 연구자료다. 그래서인지 사료 수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많다. 서지학자 이종학씨(74)가 대표적인 인물. 이순신 전문가, 독도지킴이, 사운연구소 소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종학씨도 초등학교로 학업을 마친 것이 아쉬워 책을 탐독하던 중 자료수집가가 되었다. 이우형씨가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이종학씨가 광복 후 일본이 우리측에 문화재를 인수하면서 작성한 ‘대동여지도’ 목판본 인계서를 제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최근 이씨는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1909년 석굴암 전실 사진을 공개해 지난 30여년간 계속된 석굴암 논쟁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씨에 버금가는 금석서지학자가 박영돈씨(67)다. 그도 초등학교 졸업에 은행 수위로 정년퇴직한, 학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학문하는 일에 학력이나 직업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중 하나가 일연선사비의 탁본을 발견하고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 있는 비문을 복원한 것이다.
한편 한글학계에서 한국어문연구소 남영신 소장(53)의 존재는 각별하다. 서울대 법대 1학년 시절부터 우리말 갈고닦기에 관심을 두고 ‘국어운동학생회’를 결성한 것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펴낸 것이 ‘우리말 분류사전’ 이름씨편. 이듬해 풀이말편을 펴낸 데 이어 92년 꾸밈씨편을 끝으로 토박이 우리말 사전 3권을 완간했고, 그 뒤로도 두 권의 국어사전을 더 펴냈다. 이를 위해 그는 변변한 직장도 없이 34년간 재야한글학자로 남았다.
남소장은 재야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어차피 재야와 기존학계가 할 일이 따로 있고, 필요할 때는 협력하면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갈고닦는 일에는 한글학회와 국립국어연구원, 문화관광부 그리고 남소장이 이끄는 국어문화운동본부 4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21세기 벽두에 실천할 과제로 ‘국어관리법’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업연구원 기능직 공무원인 한상배씨(64)의 경우도 박사학위 없는 ‘나무박사’로 이곳 연구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정년퇴직 후에도 계속 연구원에 출퇴근하며 한국 수목학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한씨는 선친이 산림청 공무원이어서 산림청 관사에서 태어나 평생 산림청에서 직장생활을 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2000종이 넘는 희귀종 식물을 채집했고,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1만여점의 식물표본도 스승 김이만씨와 함께 복원했다. 20년 가까이 임업연구원에서 한씨와 일해온 최명섭 연구원은 “현장연구를 필요로 하는 수목학이 3D업종으로 인식돼 젊은 연구자들이 기피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식물의 자생지에 대해 한선생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며 재야 구분 없이 공동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최근 들어 반가운 것은 강단과 재야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정우 전 서강대 교수(41·철학)와 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교수(41·철학)처럼 스스로 강단을 버리고 기꺼이 재야를 택한 사람들도 있다. 이씨는 교수직을 버리면서 “교수만이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우리 사회의 잘못된 통념”이라고 했다. 이교수는 99년 일반인 대상의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강의와 연구·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재야학자라 해서 늘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400년 동안 묻혀 있던 사암침법을 부활시킨 한의사 김홍경씨가 TV 특강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고, ‘그냥 음약인’ 임동창씨는 대학에서의 전공이 서양음악인데도 우리 가락을 설파하는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주류는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고음반연구가인 노재명씨(33)처럼 험난한 재야의 길을 자처한 젊은 연구자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이름 석자보다 직함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재야학자의 입지는 여전히 좁다. 재야철학자 김용석씨(49)는 18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어디에 기고할 때마다 그냥 ‘철학자’로 소개해도 될 것을 굳이 ‘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교수’로 바꿔놓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다. 학위 받고 학교에 자리를 잡았느냐 못 잡았느냐로 재야와 강단을 구분한다면 고미숙씨(41)도 분명 재야국문학자다. 고씨는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국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라는 이름의 지식공동체를 꾸렸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연구실을 취재한 뒤 내보낸 내용은 전혀 엉뚱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많은 고등지식인들이 제도권에 진출하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식이었다. 재야학자를 불쌍한 실업자로밖에 보지 않는 일반의 편협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학문에서 정통과 비정통, 재야와 강단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실장은 “우리 사회의 최대 약점은 단선화에 있다. 그러나 앞으로 버라이어티한 사회가 될수록 재야의 입지는 더욱 넓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재야의 반대 개념이 분명치 않다는 데서 이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국어학자 남영신씨에게 재야와 제도권의 소통 가능성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학자란 끝없이 자기와 다른 이론을 찾아 나름의 이론과 관을 확립해 가는 사람이다. 학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잣대지만 그 주제에 대한 일회적 논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공을 하지 않았어도 이론을 창안하고 정리해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손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