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연구실 컴퓨터 이메일에 악성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님다 바이러스’ 변종이라고 하는 이 사악하고 영리한 바이러스는 굳이 첨부파일을 열지 않아도 메일 목록으로 커서가 이동하는 순간 감염되며, 자기 스스로 알아서 첨부파일까지 만들어 다른 곳으로 발송하는 놀라운 지능까지 갖고 있다. 문제는 그동안 나와 교류해 온, 그래서 내 이메일 파일에 들어 있던 800여개의 주소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갔다는 사실이다.
내 이름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이 바이러스로 나는 지난 며칠 동안 가깝게 지내온 국내외 교수들로부터 무수한 항의 전화와 이메일을 받았다. 그중 뉴욕주립대 부총장은 내가 보낸 바이러스가 자기 집 컴퓨터를 파괴했으며, 하드 드라이브를 교체하느라 엄청난 수리비가 들었다고 연락해 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친한 친구로부터 온 이메일을 반갑게 열었다가 그만 불의의 봉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나는 국제무대에서 ‘휴먼 바이러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운명에 처해 있다.
바이러스 무서워 e메일 못 보내는 신세 돼서야
생전 처음 겪어본 이번 바이러스 사건은 새삼 ‘개방과 교류’가 수반하는 문제점을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해주었다. 컴퓨터 이메일은 세계 각국과의 교류를 전천후로 가능하게 해주는 놀라운 연결망이다. 그러나 개방과 교류는 필연적으로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그 교류망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가 그동안 쌓아올린 우리의 우정을 파괴한다. 이번 바이러스는 피라미드식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그 피해는 천문학적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해서 전 세계에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있다. 외부와의 연결을 단절하면 적어도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은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무섭다고 과연 인간교류를 차단할 것인가? 바로 거기에 ‘개방과 교류’의 딜레마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는 우면산 줄기의 자그마한 동산이 있다. 그런데 새벽 5, 6시만 되면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벼락치는 소리에 새벽잠에서 깨어난다. 산에 오른 사람들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너도나도 ‘야호!’를 외쳐대기 때문이다.
도심의 주택가 언덕에서 그것도 아직 컴컴한 꼭두새벽에 어떻게 고함을 지를 수 있는지 이웃집 외국인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내국인 주민들은 그들을 그저 ‘인간 바이러스’라고 부를 뿐 한숨과 함께 체념하고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가면 ‘철학자의 길’이라는 명상의 산길이 있는데, 우리 아파트의 뒷산 오솔길도 그에 못지않을 만큼 호젓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산길로 아침 산책을 나서면 느닷없이 짖으며 달려드는 개들(왜 개들을 묶어 데리고 나오지 않는 것일까), 큰 소리로 손뼉 치며 걸어가는 사람들(혈액순환을 위해서일까), 그리고 여기저기서 나무를 껴안고 거칠게 몸을 부딪치는 남녀들(나무의 기와 진을 온몸으로 흡수하기 위해서일까)의 모습에 평화로운 아침 산책과 명상은 그만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산을 폐쇄해야만 할까. 산에는 조용히 산책하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에게 상냥하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으며, 가끔씩은 애완견의 목에 줄을 묶어 데리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한, 산은 개방해야 하고 계속해서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내 이름으로 된 바이러스를 날마다 수백 통씩 받은 사람들도 이제는 나를 용서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아메리카학회장 마이클 프리시 교수는 오히려 얼마나 괴롭냐며 위로의 이메일을 보내주었으며, 영문과 한 동료 여교수는 재미있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주어(바이러스 파일은 제목이 상스러운 욕으로 되어 있다) 요즘은 좀 한가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고 눈을 곱게 흘겨주었다. 그런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한, 가끔씩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인간교류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 역시 소란하고 혼란스러워, 독재자의 눈에는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 스크린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교류와 개방과 민주주의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미국 작가 토머스 핀천은 ‘엔트로피’라는 단편에서 “폐쇄와 단절은 필연적인 파멸을 초래한다”고 경고하였으며, 추리소설의 시조인 에드가 앨런 포 역시 혼란과 소란 속에서 사건의 열쇠가 되는 단서와 숨은 진리를 찾아낸다.
바이러스가 두려워 인간교류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강력한 백신 파일을 깐 다음, 우리는 세계를 향한 이메일 통신을 계속해야만 한다.
내 이름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이 바이러스로 나는 지난 며칠 동안 가깝게 지내온 국내외 교수들로부터 무수한 항의 전화와 이메일을 받았다. 그중 뉴욕주립대 부총장은 내가 보낸 바이러스가 자기 집 컴퓨터를 파괴했으며, 하드 드라이브를 교체하느라 엄청난 수리비가 들었다고 연락해 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친한 친구로부터 온 이메일을 반갑게 열었다가 그만 불의의 봉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나는 국제무대에서 ‘휴먼 바이러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운명에 처해 있다.
바이러스 무서워 e메일 못 보내는 신세 돼서야
생전 처음 겪어본 이번 바이러스 사건은 새삼 ‘개방과 교류’가 수반하는 문제점을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해주었다. 컴퓨터 이메일은 세계 각국과의 교류를 전천후로 가능하게 해주는 놀라운 연결망이다. 그러나 개방과 교류는 필연적으로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그 교류망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가 그동안 쌓아올린 우리의 우정을 파괴한다. 이번 바이러스는 피라미드식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그 피해는 천문학적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해서 전 세계에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있다. 외부와의 연결을 단절하면 적어도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은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무섭다고 과연 인간교류를 차단할 것인가? 바로 거기에 ‘개방과 교류’의 딜레마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는 우면산 줄기의 자그마한 동산이 있다. 그런데 새벽 5, 6시만 되면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벼락치는 소리에 새벽잠에서 깨어난다. 산에 오른 사람들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너도나도 ‘야호!’를 외쳐대기 때문이다.
도심의 주택가 언덕에서 그것도 아직 컴컴한 꼭두새벽에 어떻게 고함을 지를 수 있는지 이웃집 외국인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내국인 주민들은 그들을 그저 ‘인간 바이러스’라고 부를 뿐 한숨과 함께 체념하고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가면 ‘철학자의 길’이라는 명상의 산길이 있는데, 우리 아파트의 뒷산 오솔길도 그에 못지않을 만큼 호젓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산길로 아침 산책을 나서면 느닷없이 짖으며 달려드는 개들(왜 개들을 묶어 데리고 나오지 않는 것일까), 큰 소리로 손뼉 치며 걸어가는 사람들(혈액순환을 위해서일까), 그리고 여기저기서 나무를 껴안고 거칠게 몸을 부딪치는 남녀들(나무의 기와 진을 온몸으로 흡수하기 위해서일까)의 모습에 평화로운 아침 산책과 명상은 그만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산을 폐쇄해야만 할까. 산에는 조용히 산책하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에게 상냥하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으며, 가끔씩은 애완견의 목에 줄을 묶어 데리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한, 산은 개방해야 하고 계속해서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내 이름으로 된 바이러스를 날마다 수백 통씩 받은 사람들도 이제는 나를 용서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아메리카학회장 마이클 프리시 교수는 오히려 얼마나 괴롭냐며 위로의 이메일을 보내주었으며, 영문과 한 동료 여교수는 재미있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주어(바이러스 파일은 제목이 상스러운 욕으로 되어 있다) 요즘은 좀 한가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고 눈을 곱게 흘겨주었다. 그런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한, 가끔씩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인간교류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 역시 소란하고 혼란스러워, 독재자의 눈에는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 스크린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교류와 개방과 민주주의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미국 작가 토머스 핀천은 ‘엔트로피’라는 단편에서 “폐쇄와 단절은 필연적인 파멸을 초래한다”고 경고하였으며, 추리소설의 시조인 에드가 앨런 포 역시 혼란과 소란 속에서 사건의 열쇠가 되는 단서와 숨은 진리를 찾아낸다.
바이러스가 두려워 인간교류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강력한 백신 파일을 깐 다음, 우리는 세계를 향한 이메일 통신을 계속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