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만난 충무로의 한 제작자는 스타에 목매는 자신의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제작자는 점찍어둔 여배우의 마음을 돌리려고 해외로 떠나는 그녀를 뒤쫓아 공항까지 카 레이스 벌이듯 달려가 간발의 차이로 설득에 성공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스타 캐스팅에 몸단 제작자와 캐스팅 담당자들은 목표물이 된 배우들의 촬영 스케줄을 일일이 꿰고 새벽부터 밤까지 촬영장을 쫓아다니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영화는 배우들이 다 만든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온다. ‘1000개의 제작사가 400개의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라는 말이 나오는 충무로에서 흥행에 안전핀 역할을 하는 톱스타라고 할 만한 배우는 겨우 열손가락으로 꼽을까말까 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수요와 공급의 극단적인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것.
한석규 심은하처럼 충무로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거나 “노출은 절대 안 돼” “누구 아니면 같이 안 해”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몸사리는 스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감독과 제작자들은 이제 새로운 캐스팅 방법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중 하나가 ‘주인공의 그룹화’ 현상. 남녀 주인공 한두 명에게 영화의 사활을 걸기보다 여러 명의 연기자에게 고루 역할을 배분해 차별화된 전개 방식을 선보인다.


‘인텔리전트 스릴러 무비’를 내세운 영화 ‘H’를 제작하는 영화사 ‘봄’ 역시 영화는 처음인 남자배우 지진희와 탤런트로 낯익은 염정아를 주연으로 선택했다. 봄 기획실의 변준희씨는 “처음엔 A급 스타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캐스팅이 여의치 않으면서 신인으로 눈을 돌렸다. 스타의 고정화된 이미지보다는 신인의 잠재된 가능성과 캐릭터 동화능력이 영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경우 촬영에 들어가기 전 오디션과 충분한 협의도 거칠 수 있어 제작하는 입장에선 더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영화는 영화 팬들에게도 새로운 영화 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 “2억원짜리 스타를 기용해 안전한 장사를 도모하는 것보다, 치열한 자세와 새로운 눈으로 스타를 만들어내는 것이 곧 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