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넬리우스의 오야마다 게이고. [Billboard Japan]
‘한국의 우드스톡페스티벌’을 꿈꾸던 이들의 열망으로 탄생했고 그 세월이 쌓여가며 라인업에 상관없이 매년 찾게 되는 페스티벌이었다. 하지만 올해 펜타포트는 고통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 페스티벌을 처음 만들고 지켜온 사람들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입찰에서 탈락했다. 그 대신 인천 지역언론과 과거 여러 구설에 올랐던 다른 페스티벌 기획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단순한 업계 사정일지 몰라도, 이로 인해 기존 제작진이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해외 팀을 섭외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비롯해 프로덕션 노하우가 말이다.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 펜타포트를 오랫동안 아껴온 사람들의 마음도 물거품이 됐다. 나는 트라이포트 때부터 이 페스티벌과 함께 나이를 먹어왔다. 남은 건 펜타포트라는 이름과 송도 달빛축제공원에 설치된 고정식 무대뿐이라는 소식에 처음으로 이 페스티벌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 나름의 불매운동이자 보이콧이었다. 이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인천시에 대한 소심한 저항이었다.
2019 인천 펜타포트 록페스티벌 포스터(위)와 라인업. [ⓒ인천관광공사]
‘脫일본 사운드’의 기수
플리퍼스 기타는 앨범 3장을 끝으로 해체했다. 팀의 핵심 멤버였던 오자와 겐지는 싱어송라이터 활동을 시작했고 오야마다 게이고는 영화 ‘혹성탈출’(1968)에 등장하는 침팬지 고고학자의 캐릭터 이름을 딴 코넬리우스라는 예명으로 좀 더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해왔다. 1994년 첫 앨범 ‘The First Question Award’ ‘69/96’에 플리퍼스 기타 시절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반면, 1997년 발표한 ‘Fantasma’는 일본을 넘어 미국과 유럽에도 충격을 가했다.
몸은 일본에 있으되 마음은 우주에 있는 사람의 음악이었다. 보사노바와 헤비메탈, 일렉트로닉과 1960년대 팝, 1980년대 맨체스터 사운드를 재봉선 하나 없이 화학적으로 결합한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을 두고 서양 평단에서는 ‘일본의 벡(Beck)’이라고 불렀다. 이건 딱 들어맞는 비유가 아니다. 장르를 해체하고 결합한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코넬리우스는 자국 음악의 요소라고는 거의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국적, 탈국적의 욕망이야말로 당시 일본 문화의 한 흐름이었기 때문일까.
그는 2002년 ‘Point’에서 또 한 번 진화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에서 모든 것을 뱉어내는 화이트홀로 변화한 것이다. 무엇을 채우고 연결할까 대신, 비움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느낌에 주력했다. 2006년 ‘Sensuous’에서 이는 더욱 심화됐다.
코넬리우스는 2008년 내한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Point’에서의 변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일본은 정보가 넘쳐흘렀다. 그 정보들을 내 안에 담고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Point’부터는 필요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사운드 자체보다 음과 음 사이의 여백을 활용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
그가 지난해 12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Mellow Waves’는 이런 기조를 더욱 강화한 앨범이다. 듣는 이에게 멜로디와 리듬을 기억하게 하는 대신, 공감각적 경험을 제시하는 음악이다. 감성보다 이성으로 이해해야 하는 음악이다. 오선지에 오롯이 담아낼 수 없는 수학과 과학의 예술이다.
공연도 예외는 아니다. 2008년에도, 2019년에도 달인급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반에 담긴 음악을 재현했다. 어떻게 저런 연주를 하지? 어떻게 저런 사운드가 나오지? 11년 전 들었던 의문이 이번에도 해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들었다.
2008년 첫 내한공연과 달라진 것
코넬리우스의 오야마다 게이고(왼쪽)와 2018 인천 펜타포트 록페스티벌. [flickr@Joi Ito, ⓒ인천관광공사]
2000년대 코넬리우스의 음악을 들었던 세대는 일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한국보다 일본 대중문화가 확실히 우월했다. 심지어 아직 일본 대중문화가 금지된 시절이었으니 ‘금기에 대한 동경’ 효과도 있었다. 그의 첫 내한도 페스티벌이었지만 이번보다 훨씬 많은 관객이 훨씬 더 그의 공연에 집중했다. 그때 공연을 봤던 젊은이는 대부분 이제 페스티벌 따위에는 가지 않는 기성세대가 됐고, 그 자리를 메운 지금의 세대는 일본 대중문화를 그리 동경하지 않는다.
음악은 물론이고 영화, 그리고 스포츠까지 적어도 문화에 한해서는 세계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최소한 10년 전부터 그랬다. 이 시기에 자란 세대에게 일본 음악은 ‘외국 음악’일 뿐 ‘선진국의 음악’은 아니다. 문화적 열등감을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의 의식이다. 그리고 이 의식이 현재 젊은 층이 오히려 일본 불매운동에 적극적일 수 있는 원인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코넬리우스만큼 해외 평단의 주목을 받는 뮤지션은 배출하지 못했다. 아이돌은 물론이거니와 밴드도 갈라파고스화가 됐다. 자국의 ‘오타쿠’ 내지는 마니아층이 주 시장이다. 그들에게는 ‘탈일본’ 또는 해외 진출의 욕망이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코넬리우스, 즉 오야마다가 시부야를 누비며 각국 음반을 싹쓸이하고 새로 수입된 패션 브랜드에 탐닉하던 1980년대 일본은 역동적이었다. 개화기의 슬로건이던 ‘탈아입구’가 말 그대로 사회 전반에 가득했다. 곧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자부심이 청년들의 무의식에도 거품처럼 존재했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내가 만들겠다’는 모토로 기존 일본 뮤지션과 다른 음악을 만들던 젊은이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거품경제 시대의 긍정적 기운으로 뮤지션이 됐고 그 자양분으로 결국 ‘선진국’에 영향을 미치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레이와시대 일본에는 더는 역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는 노쇠해졌고 젊은이들은 세상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제2의 코넬리우스’가 탄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무대에 선 코넬리우스는 여전히 ‘스고이’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전화도 멀리 놓고 집중했다. 그래서 더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저 세계는 쇼와시대 말기, 헤이세이시대 초기의 유산이자 ‘좋았던 일본’의 유물로 남을지 모른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