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의 미식세계

뚱뚱한 가지, 샛노란 호박, 근육질 토마토 등 별천지

‘듣보잡’ 농장물 키우는 ‘준혁이네 농장’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19-04-22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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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사들의 작물이 자라고 있는 셰프스 팜. 꽃밭인가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성한 먹을 수 있는 꽃들이 만발해 있다. [사진 제공·김민경]

    요리사들의 작물이 자라고 있는 셰프스 팜. 꽃밭인가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성한 먹을 수 있는 꽃들이 만발해 있다. [사진 제공·김민경]

    얼마 전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NewPhiloso pher)’에 실린 문장에 눈길이 멈췄다. ‘임종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보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라는 한 줄이다. 이 문장의 답을 구해보려고 꽤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애를 썼다. 

    ‘임종’을 떠올리자 생각의 머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향해 점점 기울었고, 결국 3년 전에 다녀온 긴 여행을 되새기게 됐다. 그 여행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온라인 덕분이다. 여행 도중 페이스북에 기록해둔 내 일상이 매년 같은 날이 되면 다시 보여주기 때문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날들이 유쾌하게 되살아난다. 

    온라인상에서 헤매는 것은 확실히 소모적이지만 가상의 즐거움도 확실히 얻을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만큼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며, 맛볼 수 없는 음식을 상상하고, 본 적 없는 꽃의 향기를 배우며, 사용해볼 수 없는 물건을 속속들이 살펴본다. 이렇게 주어진 즐거움이 때로는 현실의 소망과 이어져 진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남양주에서 만난 ‘펜넬’ 키우는 농장

    [사진 제공·김민경]

    [사진 제공·김민경]

    내가 음식에 대해 처음 공부를 시작한 나라는 ‘이탈리아’다. 한국에서 접해보지 못한 다양하고도 낯선 맛을 만났다. 첫 경험인 만큼 대체로 강렬했고 내 입맛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즐기다 보니 좋아져 내 일부가 된 것이다. 커피, 빵, 포도주, 채소, 과일 등 여러 가지가 그렇다. 기억마저도 희미하지만 몇몇의 독특한 맛은 수년간 내내 그리웠다. 

    지난겨울 온라인을 헤매다 반가운 정보를 찾았다. 가장 좋아하는 채소지만 싱싱한 맛을 몇 년째 보지 못한 ‘펜넬(fennel)’을 키우는 농장을 찾은 것이다. 그 농장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공처럼 뚱뚱한 가지, 늙은 호박처럼 굴곡이 확실하고 올록볼록 터질 것처럼 생긴 근육질의 토마토, 참외처럼 샛노란 호박 등 내 그리움의 대상이 가득했다. 그뿐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신기한 농작물도 넘쳐났다. 4월 초 그곳을 찾아갔다.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준혁이네 농장’은 200여 종의 작물을 조금씩 생산하는 곳이다. 언뜻 보면 일반 농가와 비슷한데 텃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식물의 별천지를 만나게 된다. 주변 마켓이나 재래시장에서 볼 수 없는 어여쁜 작물들이 줄지어 있다. 농부의 설명이 없다면 도무지 알 길도, 먹을 길도 없는 작물이 많다. 봄 텃밭에서 만난 작물은 잎과 꽃을 먹는 것이 유난히 많았다. 

    작고 어린 무화과나무는 잎을 먹는 용도로 키운다. 무화과를 닮은 달착지근한 향과 맛이 잎에서도 그대로 난다. 무화과나무 아래로 흩뿌려진 듯 네잎클로버처럼 자라고 있는 것은 우드소렐이다. 땅에 바짝 붙어 있는 데다 듬성듬성 자라 잡초인 줄 알았다. 한 송이 떼어 먹어보니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물씬 난다. 그 옆에 키 작은 나무는 월계수인데 역시 생잎을 먹는다. 바삭하게 말린 월계수 잎에 비해 맛과 향이 가볍고 잎도 무척 연하다. 

    맞은편 밭에는 꽃이 바글바글 피어 있다. 진보라, 연보라, 진분홍, 연분홍, 노랑, 주황색 꽃과 보드라운 잎을 가진 비올라로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연한 자줏빛의 길쭉한 꽃잎이 촘촘한 차이브 꽃은 여지없이 알싸하고 매콤한 맛이 났다. 흰 레이스처럼 여리게 생긴 처빌 꽃은 감미롭다. 

    꽃을 따 맛을 보느라 평소에 좋아하던 시소, 타임, 로즈메리, 민트 군락은 무심코 지나쳤다. 그러다 겨자 맛이 나는 머스터드 잎, 달싹한 한련화의 잎과 꽃, 잎을 먹으려 키우는 브론즈 펜넬, 탐스러운 카렌듈라, 새콤한 맛에 깜짝 놀라게 되는 베고니아, 늘 먹던 고수보다 훨씬 풍미가 부드럽고 여운이 긴 토종 고수의 잎과 꽃, 토양의 맛이 살아 있는 짭짤한 셀러리, 미지의 생명처럼 생긴 흰 아스파라거스 앞에 잠깐씩 멈춰 서서 그 향과 맛에 감탄을 이어갔다. 

    뿌리 작물로는 래디시, 열매로는 콩과 딸기가 한창이었다. 래디시는 붉은색 뿌리가 새끼손가락처럼 자그마할 때 수확한다. 알사탕처럼 크고 둥글게 자란 래디시보다 맛이 훨씬 달고 부드러우며, 물이 많고 연하다. 그러고 보면 요리에 사용된 래디시는 접시에 그대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먹기엔 탐탁지 않은 맛이 날 때가 잦다. 

    설탕처럼 단맛이 나는 슈거스냅이라는 콩은 알이 커질수록 단맛에 고소한 맛도 더해진다. 콩깍지를 통째로 사각사각 씹어 먹으면 달고 생생한 수분감에 목이 개운하다. 

    딸기는 설향, 백향, 킹스베리, 두리향, 그리고 야생 딸기가 있다. 딸기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품종이 같은 딸기라도 익어가면서 맛, 향, 식감이 달라진다. 새빨갛게 익은 딸기만 제맛이 나는 줄 알았는데, 딸기가 자라는 과정에 이토록 여러 가지 맛이 숨겨진 줄 미처 몰랐다.

    무투입, 무제초 등 독특한 농법으로 수확

    [사진 제공·준혁이네 농장]

    [사진 제공·준혁이네 농장]

    ‘준혁이네 농장’은 23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이장욱 농부가 일구고 있다. 농장은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 무투입, 무제초, 무비닐멀칭을 고수한다. 화학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또 비료가 땅에 잘 섞이도록 경운기를 사용해 텃밭의 흙을 뒤엎는 것도 하지 않는다. 

    밭은 고랑과 이랑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준혁이네 농장’의 밭은 나무로 틀을 만들어둬 마치 화단 같다. 밭을 뒤엎지 않아도 되기에 틀밭 형태가 가능한 것이다. 잡초는 일일이 손으로 자른다. 텃밭에 비닐을 씌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 수정은 벌이나 등에에게 맡기고 인공수정은 하지 않는다. 

    [사진 제공·준혁이네 농장]

    [사진 제공·준혁이네 농장]

    이장욱 농부는 이런 농법이 의외로 수월하다고 한다. 이 농법을 시작하고 한두 해는 적잖이 고생했다. 땅이 제자리를 찾고 정상적인 생태 환경이 갖춰지는 동안 벌레가 작물을 몽땅 파먹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모든 환경이 자연스러워지니 벌레와 작물이 공생하기 시작했고, 작물을 수확할 수 있게 됐다. 

    1 살짝 덜 익어 산미가 돋보이는 딸기, 잘 익어 단맛이 돋보이는 딸기, 야생 딸기를 이용해 만든 타르트 .2 황금 주키니와 그린 주키니를 이용해 만든 호박선. 주키니를 얇게 밀어 층층이 쌓고 콜드브루잉한 멸치육수와 새우젓을 넣고 익힌 후 호박 자투리로 만든 콩소메를 곁들였다. [사진 제공·밍글스]

    1 살짝 덜 익어 산미가 돋보이는 딸기, 잘 익어 단맛이 돋보이는 딸기, 야생 딸기를 이용해 만든 타르트 .2 황금 주키니와 그린 주키니를 이용해 만든 호박선. 주키니를 얇게 밀어 층층이 쌓고 콜드브루잉한 멸치육수와 새우젓을 넣고 익힌 후 호박 자투리로 만든 콩소메를 곁들였다. [사진 제공·밍글스]

    농장 한편에는 요리사와 농부가 함께 일구는 ‘셰프스 팜(Chef’s farm)’이 있다. 여러 요리사가 각자 원하는 작물을 키우는 특별한 영역이다. 밍글스의 강민구, 오프레의 이지원, 주옥의 신창호, 권숙수의 권우중, 임프레션의 서현민, 오스떼리아 로의 노지민, 서울다이닝의 김진래, 리틀앤머치의 정승기 셰프 등 유명한 식당과 셰프들이다. 하나같이 셰프의 개성과 독특함이 담긴 음식을 내는 곳들이다. 이토록 다채롭고 신기한 작물들이 요리사의 손끝에서 어떻게 달라질지 내 짧은 상상으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요리사가 작물을 알고, 농부가 요리를 알게 되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맛의 스펙트럼이 무한히 넓어짐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장욱 농부

    특별한 작물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원래 오이, 감자, 가지, 토마토 같은 평범한 작물 위주로 키웠다. 그러다 흰색이 아닌 초록색의 콜리플라워를 재배해 시장에 들고 나간 것이 계기가 돼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요리사가 원하는 작물을 키우게 됐고, 여러 요리사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작물도 많이 알게 됐다.” 

    일반 소비자는 ‘준혁이네 농장’의 작물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나. 

    “온라인 판매는 하지 않고 소비자와 농부가 직접 만나는 장에서만 판매한다. 도시농부장터 마르쉐에 비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종종 도심에서 작은 장터를 열어 판매하기도 한다. 장터를 열 때는 ‘준혁이네 농장’ 인스타그램 @lettucejang에 미리 정보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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