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사회생활을 했을 때는 손으로 보고서를 써서 타이피스트(typist)에게 넘기면, 그 사람이 타자를 쳐서 정리해줬어요. 어느 날 갑자기 워드프로세서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했죠. 그러면서 제가 PC로 보고서를 직접 정리해야 했어요. 단순한 문서 정리뿐 아니라 파워포인트를 활용해 자료를 보기 좋게 꾸미기까지 해야 했고요.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저희 회사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잘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접니다(웃음).”
온라인 리서치기업 마크로밀 코리아 주영욱(50) 대표는 “삶은 매일매일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이런 변화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1960년 전후에 태어난 ‘NEO 50’은 넉넉하지 않아도 극도의 기아와 빈곤에서는 조금 벗어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1980년 스무 살 성인이 됐을 때 ‘민주 사회를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맛봤다. 물론 바로 깊은 좌절에 빠져야 했지만 말이다.
이 시기에는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총천연색 컬러TV가 처음 도입됐고(1980년) 대학생 수가 급증했으며(1981년), 프로야구를 시작했고(1982년) 야간통행 금지를 폐지했으며(1982년), 교복자율화도 실시했다(1983년). 이는 당시 전두환 정권의 당근 또는 3S(스크린, 스포츠, 섹스)로 통칭되는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머리가 말랑말랑했던 젊은이 ‘NEO 50’에게는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진 사회·문화적 자극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는 PC와 각종 업무용 소프트웨어, 무선 호출기(삐삐)와 휴대전화 등이 사업장에 가장 먼저, 그리고 본격 도입되던 시기다. 또 세계화 시대를 맞아 직장인들 사이에 영어 공부 열풍이 불었다. 실제로 영어 실력이 업무 능력향상과 출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미 제국주의 타파’를 외쳤던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을 위해 영어 테이프를 듣고 영어책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넓어진 사회·문화적 자극
트위터 등을 통해 젊은 세대와 꾸준히 소통해온 배우 김갑수는 일명 ‘갑본좌’로 불리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본격 향유하기 시작한 ‘NEO 50’은 ‘마이카’ 시대를 열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 1만 달러(1995년)를 넘으면서 여가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이들은 전셋집에 살아도 차는 한 대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지게 됐다. 당시 부(富)의 상징은 자동차 한 대, 서울의 아파트 한 채였다.
하지만 직장생활 10년 차 안팎이던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바로 위 상사들이 무자비하게 잘려나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49) 교수는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며 회사에 충성했던 상사가 하루아침에 잘리는 걸 지켜본 이들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며 “회사에 있으면서도 조직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게 된 첫 세대”라고 설명했다.
반면 앞 세대의 부재는 이들에게 기회가 되기도 했다. 문화예술전문법인 (주)아르떼피아 이철주(47) 대표는 “외환위기 이후 회사에 수직적 구조가 아닌 수평적 구조인 ‘팀(team)’ 제도가 도입됐는데, 우리가 처음 팀장을 맡아 그 팀을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팀제 도입은 상하관계가 명확했던 회사 문화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프로젝트마다 유연하게 팀이 꾸려지고 해체됐으며, 직급이 낮은 사람도 사안에 따라 팀장을 맡을 수 있었다. 빠른 의사 결정이 가능했으나, 프로젝트 성공과 실패에 따른 성과와 책임 역시 고스란히 팀장을 비롯한 그 팀이 져야 했다.
앞 세대 부재가 오히려 기회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뒤 50세를 맞았거나, 50세를 앞둔 ‘NEO 50’은 2011년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우선 이들은 “과거 50세와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주영욱 대표는 “20대의 역동적인 성향,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는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시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경제적·심리적 여유가 더해졌다”고 강조했다.
지난 50년 삶이 변화의 연속이었던 만큼,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도 별로 없다. 이들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아이패드, 캘럭시탭 등)를 큰 어려움 없이 사용하고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 SNS 서비스도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실제로 방송통신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스마트폰 이용 실태 조사 결과 보고’를 보면 스마트폰 이용자 중 40, 5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36.6%에 이르렀다(2010년 11월 기준).
또 이들은 여전히 멋진 남성, 아름다운 여성이 되려고 돈과 시간을 들여 ‘자기 관리’를 한다. 20대 때 시작한 관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한 외국계 회사 임원은 “조금만 살이 쪄도 식사 조절을 하고 운동한다”며 “한 회사의 대표나 임원이 지나치게 살찐 모습이나 초라한 옷매무새를 보이면, 투자를 받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고 귀띔했다. 자신의 외모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 어떻게 투자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 즉 최고경영자(CEO)의 외모가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NEO 50’은 회사와 가정,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려고 노력하는 첫 세대이기도 하다. 또 이들은 자녀들에게 엄부자모(嚴父慈母)가 아닌 ‘친구 같은 부모’가 되길 원한다. 대기업 강모(49) 부장은 “일주일 중 이틀은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한다”며 “하루는 가족을 위해, 하루는 나 자신을 위해 쓴다”고 했다. 물론 일이 몰리거나 출장 등을 떠나면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 원칙을 지키려 노력한다는 것.
또 ‘여가’라는 개념이 등장했던 1990년대 결혼과 출산, 육아를 한 만큼, 이들은 어린 자녀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고 함께 국내외 여행도 많이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성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순전히 자신만을 위한 취미생활도 열심이다. 등산, 골프뿐 아니라 사진 찍기, 산악자전거 타기, 악기 연주, 미술 감상, 댄스 등 영역도 넓어지는 추세다.
‘NEO 50’은 취미생활도 열심히 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사진을 찍으러 나간다는 마크로밀 코리아 주영욱 대표.
노후 준비 역시 과거 50대와는 다르다. 은퇴 후 단지 연금에 의존해 산다거나 제2의 삶을 새롭게 꾸리려고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영역에서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고 준비와 노력도 하고 있다는 것. 30년 가까이 리서치 업계에서 일해온 주 대표는 “리서치 분야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전문성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하는 젊은이들보다 여유가 있는 만큼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하면서 더욱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58년 개띠’ 세대와 ‘386 중심’ 세대 사이의 과도기에 있었던 만큼, ‘NEO 50’은 늘 가치관의 혼란을 겪어왔다. 이는 ‘이중적’인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철주 대표는 “공동체를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사회적 가치에 발목을 잡히면서도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며, 돈을 좇으면서 명예도 함께 좇고, 아날로그적 성향이 강하면서도 디지털을 추구해왔다”고 했다. 즉, ‘소녀시대’를 만들면서도 ‘남북 평화음악회’를 기획하는 게 이들이라는 것. 그렇기에 ‘NEO 50’은 자신의 성향이 ‘중도’이고, 상황이나 사안에 따라 ‘중도보수’와 ‘중도진보’ 사이를 오간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이런 카오스적 갈등이 우리를 발전시켰으면서도, 지금껏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고 토로했다.
또 베이비붐 마지막에 태어난 만큼 이들 역시 인구가 무척 많다. 또 대학생 비중이 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학력 스펙트럼이 넓은 데다, 온갖 사회 변화를 잘 적응해왔는지 여부에 따라 현재 삶의 모습이 개인마다 무척 다르다. 즉, 앞서 설명한 ‘NEO 50’의 성향이 이 세대 모든 이에게 나타난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사회 최일선에서 변화를 이끌어온 만큼, ‘NEO 50’이 보여줄 앞으로의 모습도 현재 50대의 그것과 다를 것임은 분명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