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민주당 원내대표실에서 전병헌 원내대표(맨 왼쪽)가 모두발언을 하는 동안 교육문화 체육관광위원회 야당 간사인 유기홍 의원 자리에 최근 논란이 된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놓여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교과서 부실 검정이 연일 도마에 오르자 교육부가 편수조직 부활 카드를 빼들었기 때문이다. 역사 왜곡과 이념 편향 시비가 한국사 논쟁 1라운드였다면, 일선 학교의 교학사 교과서 채택 논란(2라운드)을 지나 교과서 발행체제 개편을 둘러싼 3라운드가 시작됐다.
좌우 이념 논쟁만 부각
편수조직이란 교육부가 교과서를 편집하고 수정하려고 설치하는 전담 조직을 말한다. 우리나라 검정교과서는 현재 한국사의 경우 국사편찬위원회, 수학과 과학은 한국과학창의재단, 국어와 도덕, 사회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위임받아 검정한다. 교육부는 컨트롤타워 구실만 할 뿐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편수조직 부활을 고려하겠다는 말은 교육부가 이제부터 교과서 검정 과정에 팔 걷고 나서겠다는 뜻이다.
민주당과 진보 성향의 학자 및 시민단체는 이를 국정교과서 전환 신호탄으로 해석한다. 편수조직이 국정교과서와 운명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편수조직은 1948년 문교부가 생기면서 함께 등장해 국정교과서 편찬부터 발행, 공급까지 전반적인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덩치 큰 조직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평가원 등이 설립되고 교과서 발행 체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뀌면서 편수조직은 96년 폐지됐다. 그 후 지금까지 편수 업무는 교육부 학교정책실이나 교육과정기획과의 과장급 업무로 축소됐다.
교과서 체제가 검정으로 바뀐 이유는 역사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였다. 2002년 검정으로 전환한 근현대사 교과서부터 따지면, 올해로 한국사 교과서에 검정이 도입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갈수록 취지는 흐려지고 좌우 이념 논쟁만 부각되는 모양새다.
국정교과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건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때부터다. 당시 새누리당은 “국가적으로 통일성이 필요하니 한국사를 국정교과서 체제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며 공론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교과서 내용 수정에 가려 잠잠해졌다 연초 진보단체가 대대적인 교학사 교과서 불채택 운동을 벌인 것을 계기로 국정교과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1월 6일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한 고교 20곳이 반대 여론에 못 이겨 줄줄이 선정을 취소하자 “교과서를 하나 만들었는데 1% 채택도 어려운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라며 운을 뗐고, 9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직접 기자실을 찾아 “교육부 내에 편수 전담 조직을 두겠다”고 밝혔다. 13일 당정협의에서는 “모든 시스템을 폭넓게 들여다보고 장기적으로 제도를 설계해나갈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국정으로의 전환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민주당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강력히 반발한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야당 간사이자 민주당 역사 교과서 친일독재미화왜곡 대책특위 위원인 유기홍 의원은 “편수조직은 국정교과서 이행을 위한 태스크포스(TF)가 될 것”이라며 “민주 선진국에서 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는 없다”고 주장한다.
전교조도 “편수조직 부활은 정권 입맛대로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국정교과서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며 이는 과거로의 회귀”라고 반대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는 “국정 전환도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독립적인 기구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는 중간적인 의견이다.
편수조직의 구체적인 모양새와 국정교과서로의 전환 여부는 상반기 중 결론이 날 전망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의 입장차가 워낙 커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성향을 떠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은 있다. 현행 교과서 발행 체계가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번 교과서 제작 과정만 봐도 출판사에서 검정교과서 개발에 착수해 교육부에 초안을 제출할 때까지의 기간이 1년 4개월에 불과했다. 필자 구성에 걸리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실제 집필 기간은 10개월 정도밖에 안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과서를 심사하는 검정위원은 6명, 실제 심사 기간은 2~4개월이다.
올해 검정 심의를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교육부에서는 교과서기획과 담당자 3명이 국정 53종, 검정 42종, 인정 494종 등 총 684종에 달하는 교과서 업무를 맡는다. 결국 교과서 집필 기간과 심사 인원을 늘리지 않고서는 왜곡 논란을 피하기 힘들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집필하고 심사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넘어오면 견해가 분명히 갈린다. 한국현대사학회 대외협력위원장인 강규형 교수(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는 “검인정 제도는 일정 기준을 통과한 교과서에 대해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것인데, 이번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보듯 다양성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압살됐다”며 “이런 식으로 운영할 거라면 국정으로 전환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교학사를 집필한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단체다.
강 교수는 또 “이번 한국사 교과서 사태를 통해 검인정 제도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졌다”며 “국정으로 돌아가되 학계에서 인정받는 대가를 중심으로 집필진을 구성하고, 특히 현대사는 국사학계 전문가층이 얇기 때문에 정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도 저자로 참여하게 한다면 왜곡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반대로 국가가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대부분이 검인정 체제를 지나 자유발행제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국정으로 회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진보 성향의 한 교수는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면 독립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교육부는 최소한의 지침만 주고 나머지 부분은 역사학계에 맡겨야 역사 교과서가 정치화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