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리 일원에서 열린 ‘지평리전투’ 기념행사에서 병사들이 한국전쟁 당시 지평리 전투를 재현하고 있다. 이 행사는 이곳에서 중공군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둔 프랑스와 미군에 감사를 표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미국, 일본을 아시아 동반자로 인식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역사인식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전쟁을 보는 관점이 대부분 한국사의 맥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는 한국전쟁을 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사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일어난 전쟁은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고, 그런 만큼 전쟁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적 안목이 필요하다. 한국전쟁과 세계사의 관련성은 냉전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정세의 변화가 전쟁의 배경이 됐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꾸로 한반도 바깥세계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근래 구미 역사학계는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의 역사, 즉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영향력을 발휘한 역사적 현상에 관심을 갖는데, 한국전쟁이야말로 새로운 경향에 딱 맞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현상으로서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전후 일본과 서독의 국가 형성과정이 주목을 끈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일본은 패전국으로 미군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둘러싸고 도쿄 맥아더 사령부나 워싱턴 당국은 내부적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한편에서는 군국주의 일본의 민주화를 목표로 정치·사회·경제구조 개혁에 중점을 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의 증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론자들의 입지가 약해졌다. 미국의 재정지원으로 일본의 개혁을 뒷받침하려는 개혁론자들의 구상이 환영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소 냉전의 도래와 함께 개혁보다는 일본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정책이 더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은 미국 대일정책의 강조점이 변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미 1949년 중국의 공산화를 통해 동아시아 주요 동맹국을 상실한 미국은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일본을 동반자로 인식했고, 일본의 민주화보다는 국제적 역할을 중시하게 됐다. 그리하여 미국은 종전 후 미뤄왔던 일본과의 협상을 서둘러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으며, 이에 따라 미군정이 종식되고 일본이 주권을 회복했다. 국내 여론 때문에 재무장을 꺼리던 일본 정부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요청을 수락해 7만5000명의 병력으로 경찰예비대를 창설했고, 1951년 미국과 안보조약을 맺어 오키나와를 포함해 여러 곳의 군사기지를 미국에 제공했다. 미일 동맹체제라는 냉전시대 동북아 국제질서의 핵심 틀은 한국전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일본의 정치와 사회는 이른바 ‘역(逆)코스(reverse course)’를 밟기 시작했고 보수화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즉 학교교육, 지방자치, 노사관계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군정이 추진한 개혁을 되돌려 패전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나타난 것이다.
서독의 주권 회복과 서방 통합
1951년 7월 17일 전쟁으로 파괴된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한국군 병사. 앞에 보이는 전투식량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한반도 전쟁특수는 일본이 전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한국전쟁의 여파는 한반도와 이웃한 일본 열도만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유럽지역에까지 미쳤다. 특히 분단국가로서 미국을 비롯한 승전 연합국의 군정 아래 있던 서독의 경우 한국전쟁이 미친 영향은 여러모로 일본과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먼저 한국전쟁이 ‘라인 강의 기적’으로 일컫는 1950년대 서독의 경제성장의 계기가 됐다는 점이 그렇다. 전후 분단 상태에서 서독 지역에는 전시 통제경제 대신 자유 시장경제 질서가 도입됐지만 물가상승, 파업, 실업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났다. 경제침체로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던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서독의 경제와 사회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즉, 서독은 한국전쟁이 가져온 특수를 이용해 1952년부터 경제성장의 애로를 타개하고 수출을 동력으로 한 경제성장 전략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외교 및 군사 정책에서도 서독 정부의 구상이 관철될 수 있는 전제를 마련했다. 1949년 분단국가 수립과 함께 초대 총리로서 서독 정부를 이끈 아데나워는 서독이 국제법상으로 주권을 회복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는 것을 대외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아데나워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연합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그는 서독이 적대관계에서 전쟁을 치렀던 연합국 세력에 대해 충실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임을 입증할 때 비로소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 주권국가로 국제적 지위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아데나워는 냉전체제 아래 서방 연합국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 군사적 기여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건국 초기부터 서독이 서방 군사동맹세력의 일부로서 무장하는 대신, 연합국이 서독의 주권을 제한하는 점령조치를 폐지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나치가 도발한 전쟁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했고, 국내적으로도 반(反)군국주의를 내건 반대 여론이 강했다.
한국전쟁은 서독의 재무장을 금기시하던 상황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미소 군대가 철수한 한국과 독일의 여건은 여러모로 달랐지만 한국과의 비교는 유효성을 발휘했다. 한국전쟁은 분단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에 희생된 사례로서 서독뿐 아니라 서유럽 사회에 일대 경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동독의 공산주의 정권이 소련의 후견 아래 준(準)군대에 해당하는 5만~6만 명의 전투인민경찰을 창설한 사실이 침략전쟁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의 실질적 근거로 작용하기도 했다.
여하튼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의 도발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아데나워의 대외정책에 돌파구를 제공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서독의 재무장과 서방 편입에 대한 구상을 외교문서로써 공식화해 서방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1952년 서독과 서방 연합국 사이에 ‘독일조약’이 체결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전후 점령체제를 법적으로 종결한 이 조약에서 서독은 서방 동맹세력의 일원으로 군사적 역할을 약속했고, 서방 연합국은 서독과 서베를린의 방어를 보장했으며, 대외관계를 제외하고는 서독 정부의 통치권을 인정했다. 한국전쟁은 아데나워가 서독의 주권 회복과 서방 통합이라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