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행복하려고 산다.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럼 또 묻게 된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행복을 느끼는 구체적인 경우는 각자 다르겠지만, 행복할 때 반드시 나타나는 신체반응이 있다. 감탄이다. 감탄이 동반되면 그 순간 행복하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가는 이유는 그곳의 유적이나 문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을 보고 감탄하기 위해서다. 여름휴가 때 밀리는 고속도로를 뚫고 바다로 향하는 이유도 단지 바다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다가 보이면 모두들 한결같이 ‘와’ 하고 감탄한다. 즉 감탄하기 위해 바다로 가는 것이다.
식욕, 성욕은 동물에게도 있다. 인간의 욕구만은 아니다. 즉 생존과 종족번식을 위한 동물적 욕구일 따름이다. 인간의 욕구는 ‘감탄의 욕구’다. 인간문명은 이 ‘감탄의 욕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먹고사는 일과 관계없는 그림을 왜 그리고, 노래를 왜 부르기 시작했을까. 감탄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감탄의 욕구를 바탕으로 한다. 동물은 새로운 것을 보면 두려워한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감탄한다. 그래서 동물과는 다른 진화과정을 걷게 된 것이다.
독일이 통일된 뒤 동독인들이 가장 먼저 구입한 물건은 자동차였다. 그 전까지 동독에는 트라비(트라반트의 줄임말)라는 한 종류의 자동차만 있었다. 1957년부터 생산된 트라비는 동독 사회주의의 자랑이었다. 플라스틱으로 차체를 제작하고, 2기통 엔진으로 연료 효율성을 극대화한 ‘최첨단’ 자동차였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인간은 감동 느껴야 사는 재미가 쏠쏠
동독 공산당은 더 이상의 자동차 개발은 필요 없다고 했다. 더 폼나게 차 모양을 바꾸는 일은 인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단정지었다. 속도도 시속 80km면 충분하다면서 더 빠른 것은 자본주의의 허영이라 했다. 그 사이 서독은 더 사치스럽고 빠른 자동차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결국 동구 사회주의는 망했다. 감탄의 욕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념교육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탄의 욕구는 성욕만큼이나 근본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삶의 감탄이 적을수록 사람들은 상품구매를 통해 감탄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 후기 자본주의는 이 빈틈을 기가 막히게 파고든다. 그러나 감탄의 자본주의적 구매행동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어김없이 적용된다. 갈수록 더 비싸고 가치 있는 상품을 구입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감탄에는 ‘한계효용 증가의 법칙’이 적용된다. 어느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아주 세밀한 차이에도 감탄,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마니아적 삶이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나 경제가 아니다. 아무도 감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척박한 문화는 감탄을 빼앗아가고, 감탄의 부재는 다시 적개심에 가득 찬 문화를 만들어낸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감탄이 없는 사회는 더 이상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다. 감탄이 사라지면 더는 인간이 아니다.
지난 3일간 감탄한 적이 있는가. 그럼 사람답게 산 것이다. 감탄한 기억이 없다면, 미안하지만 먹고는 살았지만 사람으로 산 게 아니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수록 음악회도 가야 하고 미술관도 가야 한다. 훌쩍 혼자 떠나기도 해야 한다. 그럼 감탄이 돌아오고, 사는 목적이 다시 분명해진다. 정말이다.